이종철 _전북대학교박물관, 문학박사
김완순 교동미술관 관장이 9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박물관협회 주최 '2023 박물관·미술관인 신년교례회'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김관장은 “지역 문화예술계가 더 든든히 서나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지원해나가겠다”고 수상의 소감을 전했다./편집자 주
△수상의 감회가 어떤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마음 편하게 오가면서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그런 골치 아픈 거 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는 만류가 많았다. 하지만 옛 공장을 수리해서 '교동아트' 문패를 올린 지 20여년이 된가고 있다. 지고가기 버거운 무게가 느껴져서 내려놓고 싶을 때마다 새힘을 낸 것은, 눈빛을 보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새삼 '고맙습니다'라고 되뇌어 본다.
△올해 사립미술관 중 유일하게 국무총리 포상자에 선정됐다고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중앙박물관이 후원하며 한국박물관협회의 주관으로 열리는 2023 박물관·미술관인 신년교례회'는 우리나라 박물관・미술관 활성화와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를 대상으로 정부 포상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 사립미술관 중 유일하게 국무총리 포상자에 선정돼 감회가 새롭다. 사립 미술관과 박물관 운영은 생각보다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문화예술인들의 고충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비영리 사립미술관의 유일한 수입원은 입장료와 공적자금이다. 하지만 입장료 수입은 미미할뿐더러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일도 생각처럼 쉽지 않아 장기적인 운영계획을 세우기는 어렵다. 즉 연간 전시비용, 인건비, 공과금 등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수억에 달하는 미술관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일은 오직 설립자 개인 몫이다. 공적자금으로 운영되는 공립미술관에 비해 사립미술관은 재정상태가 열악해 새로운 인력을 뽑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전시를 할수록 출혈지출이 되는 구조가 됐다. 사재를 털어가며 전시를 해 왔다는 걸 미술계 사람들은 안다. 이제는 미술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강행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개인이 설립한 사립미술관들 중에는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를 자주 개최해 지역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교동미술관을 포함한 우수 사립미술관은 저예산으로도 차별화된 주제와 뛰어난 큐레이팅으로 전시기획의 모범사례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전국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문화예술도시'를 표방하고 문화도시 구호를 확산하고 공립미술관을 신축하는데만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역에서는 군 단위까지 공립미술관이 경쟁적으로 선다. 과거에 사립이 하던 일을 공립이 대체하니 사립미술관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업 성공의 핵심은 역점과제 제시나 신규 공립미술관을 경쟁적으로 짓는 것보다 기존의 공공성을 지닌 우수 사립미술관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육성 지원하는 행정으로 전환되야 한다. 역사와 노하우를 가진 개성이 강한 사립 미술관을 지원하는 것이 건물만 번듯한 공립 미술관을 짓는 것보다 100배 낫다. 기존 사립 미술관이 공공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면 그게 공립 미술관에 준하는 거 아닌가.
평가 점수가 좋은 우수 사립 미술관을 선택과 집중으로 지원해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하는 것이 지자체차원에서 예산 낭비를 줄이는 길”이며 문화 다양성을 실천할 있는 길이다. 교동미술관 등 지역에 있는 미술관들이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모범적으로 운영해 성공하는 사례들을 만들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고맙겠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해오다가 수상하게 됐나
전주 한옥마을에 방치된 공장 터를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2007년 미술관으로 개관, 현재까지 15년간 약 100여회의 기획전시를 무료로 개방해오며 도민과 관광객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 문화공헌을 위해 노력해왔다. 교동미술관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음으로 전주시로부터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또,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의 MOU 업무협약과 미술관 문화가 있는날,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창의적문화영재교육, 전라북도인재평생교육프로그램 등의 사업추진을 통해 원도심 아동, 다문화 이주여성, 경력단절 주부, 한옥마을 원주민, 지역 어르신 등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적 강의와 예술체험을 결합한 융복합 문화예술 강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교동미술상’을 사비를 들어 시상한다고 들었다
매년 ‘교동미술상’을 선정, 창작지원금 수여와 전시개최 후원을 통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장년 작가들의 창작 동기 증진 및 역량 강화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계층 구분 없는 공간 운영으로 문화예술 인력 창출 및 지역예술계의 성장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며 사회적 공헌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교동미술상은 지난 2011년 도내 작가 창작 역량 강화와 예지를 불사르는 작가를 응원하고자 제정됐다. 기존에는 만 40세 미만 청년 미술가만 대상으로 했으나, 지난 2021년 더 많은 작가를 후원하고자 만 60세 미만 장년 미술가 부문을 추가했다. 장년부문 수상자에게는 창작지원금 700만원을, 청년부문 수상자에게는 창작지원금 300만원을 각각 주고 있다.
△섬유공장을 리모델링해 갤러리로 활용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
1980년대 중반 팔복동으로 공장이 옮겨간 뒤 20년 넘게 빈 건물로 방치됐다. 한동안 건물을 사용하지 않는 바람에 이 일대는 슬럼가나 다름없는 우범지대를 방불케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섬유를 전공한 까닭에 공장 건물을 작업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렇게 생각만하다 3년을 보냈다. 시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작업실로 썼으면 한다는 의향을 비쳤는데 흔쾌하게 승낙을 해주셨다. 처음에는 철거한 뒤 신축할 계획이었다. 남편과 대화하면서 시아버님의 흔적이 담긴 공간을 보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해외 사례를 통해 부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리모델링으로 선회했다.
△개인적으로는 꾸준하게 한지 작품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 한지를 말하면 할 이야기가 많다. 전주한지는 품질이 뛰어나다. 원주한지, 안동한지를 써봤지만 전주한지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런데 전주한지가 언제부터인가 원주한지에 주도권을 내주고 밀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지축제도 전주가 먼저했는데 이제는 원주의 외연이 더 커졌다. 원주한지축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전주 출신 한지 장인을 만나 놀랬다. 원주시에서 한지장인을 유치한 것이다. 전주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한지장인이 전주에서 정착해 활동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 가나자와 방문 당시 일본 화지 장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활동에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주시도 전주한지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좌우명 같은 것이 있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영민함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과 같이 있으면 행복히다. 이제 더 성숙하게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한다. 그 여정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365일 움직이는 다리를 자청했던 ‘교동(橋動)’아트 미술관이라고 들었다
미술관 이름이 ‘교동’인 것은 한옥마을이 교동(校洞)에 있어서가 아니라 작가와 대중의 소통의 장이자 작가들에겐 참신한 작품들이 끊임없이 창조되는 소통의 통로, 즉 움직이는 다리가 되고자 했던 설립자의 뜻을 담아 ‘교동(橋動)’미술관이라 했다. 2007년 4월의 어느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교동아트미술관이 문을 연 날을 기억한다. 50여 년 동안 의류 제조 공장으로 쓰이던 건물을 고쳐 미술관을 연다는 것이 당시에는 무척 새로운 발상이었습니다. 20여 년이 되가는 지금, 교동아트미술관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청년작가들이 이곳에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선보였으며, 많은 중견작가들이 이곳에서 깊이 있는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작고작가들 또한 이곳에서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 수준 높은 기획전과 레지던스 프로그램, 문화예술교육사업, 소외계층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교동미술관은 풍요롭고 아름다웠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는 문과공간이 곁에 있다는 것, 참으로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미술관이 위치한 이곳 일대는 내의류업체인 백양메리야스를 제조하던 한흥물산 주식회사와 백양섬유 주식회사의 생산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1950년대 이후 공장이 이전된 1980년까지 생산활동을 하던 공장터였다. 옛 공장에서는 편직, 염색, 봉제시설을 갖추었고 한때 전국 내의류시장의 80%를 점유하며 500여명의 근로자가 종사하던 일터이기도 했다. 이 터는 교동미술관을 포함한 일대 약 8250㎡(약 2, 500평)이었으나 현재는 일부에 교동아트스튜디오와 최명희문학관, 중앙초등학교가 들어섰고, 터 가운데에는 소방도로가 개설됐다. 교동아트미술관은 옛 공장의 추억과 정취를 유지하고자 1960년대에 건축한 봉제공장 일부를 원형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를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해 2007년 4월에 개관했다. 편직공장이었던 교동아트스튜디오는 1960년에 건축됐으며, 1970년경 화재로 인해 천정 구조물 일부가 화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곳 역시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시관과 아트스튜디오를 위한 공간으로 리모델링, 2010년 7월에 개관했다. 고즈넉한 야외 마당에서 펼쳐지는 소풍 같은 시간! 아름다운 한옥을 배경삼아 달빛과 별빛, 귀를 애무하는 전주천의 바람, 시원한 전주 막걸리 한 잔에 얼쑤 흥겨운 추임새, 실컷 넣어도 한옥마을에서는 무죄다. 죄가 있다면 나 혼자 공연을 보러 왔다는 사실 단 한 가지 뿐이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체험의 도시하면 바로 전주가 떠올려진다. 전주에는 풍부한 문화 향유 기회를 느낄 수 있는 교동아트센터 등 각종 전통문화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체험에서 음식, 숙박까지 한국의 전통미를 그대로 살린 전통문화시설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가야할지 언제나 고민이 된다.
△교동미술관은 전주 한옥마을의 보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대한민국의 꽃심은 전주다. 전주가 우리나라의 꽃심일 수 있는 것은 한옥마을이 있기에 그렇다. 한옥마을 팔작지붕은 다른 도시의 한옥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그 곡선은 가파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휘영청 늘어졌다. 우리의 고운 춤사위를 닮았다. 오목대에서 내려보면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줄지어 사뿐히 버선 발을 내딛는 수십 수백명의 고운 여인네들 같다. 그런 여인네들 한 가운데 치마 끝에 가려 보일듯 말듯 하얀 버선발을 모으고 춤사위를 마친듯 그냥 서있는 여인이 있다. 바로 교동아트미술관이 아닐까 한다. 그녀에게서는 연꽃 내음이 난다. 한옥마을이 그냥 떠들썩한 저잣거리가 아닌 조신하고 기품있는 모습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자태에 크게 힘입었을 터이다. 세속의 잇속을 넘어선 그녀가 이렇게 곱게 서있기 벌써 20주년을 초읽기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꽃심, 전주한옥마을의 꽃심은 바로 교동미술관이다. 거기에는 꽃향기로 남쳐난다. 소통을 모토로 움직이는 다리를 자청했던 교동(橋動)미술관, 지난 16년간 무던히도 많은 가교를 건설했다. 교동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옛 백양메리야스공장’은 추억의 메리야스를 떠올릴 수 있는 전주 섬유산업의 공간이자, 산업시설을 문화시설로 개편·활용한 사례'로 전주시가 '전주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김완순 관장이 걸어온 길
김관장은 2007년에 교동아트미술관을 건립,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재)전주문화재단 이사, 전라북도 미술작품 심의위원,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작품수집위원, (재)전주문화재단 인사위원장, 전라북도 박물관미술관 진흥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디자인공예부문 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국미술협회 공예분과 자문위원, 한국전통문화전당 인사위원,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이사, 한국공예가협회 이사, 전라북도박물관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본상, 문광부장관상, ‘제1회 자랑스러운 박물관인·미술관인 전북도지사상’ 등도 받았다,
김관장은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원 공예학과 섬유공예 석사과정을 졸업, 한지에 천연염색을 하거나 다양한 재료를 사용, 생성과 소멸, 그리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전국한지공예대전 초대작가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
익산은 만경강과 금강 하류권에서 선사·고대문화의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는 도시다. 전북혁신도시가 발굴조사되기 전까지 금강 유역권 청동기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져 온 곳이다. 또한 미륵사와 왕궁리 등 금마(金馬)를 중심으로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고학적·역사적 배경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익산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지난해 11월 고도 익산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학술회의에서 마한의 소도가 익산 영등동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1995~96년 사이에 발굴조사된 영등동 유적에서 성격을 알 수 없는 5겹의 원형 환구(環溝)가 확인되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마한의 제사유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원형 다중환구의 중앙에 큰 나무를 세웠던 구덩이가 존재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韓傳)에 언급된 마한의 ‘입대목현령고(立大木縣鈴鼓 :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다)’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로 풀이된다. 유적의 연대가 서기 2~3세기에 해당하여 삼국지의 편찬 시기인 기원전 3세기 후반과도 일치한다. 주목해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영등동 유적의 제사적 성격을 마한의 소도로 볼 수 있다면, 한자로 쓰여진 蘇塗의 해석에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즉 진흙 또는 길[塗]이라는 의미는 5겹으로 된 동심원 형태의 환구에서 벌어지는 집체적인 유희체제에서, 소생[蘇]의 의미는 집체적인 유희 과정 중 당시 제사장[天君]이 죄를 사하여 주고, 죄인을 잡아갈 수 없도록 해주는 행위에서 추론할 수 있다. 특히 5겹이나 되는 원형의 환구는 제사장의 강력한 지도력과 신성불가침의 표상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등동 제사유적은 만경강 유역 어딘가에 존재했을 국읍의 소도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마한사회의 농경의례, 신(神)에 대한 공헌의례를 위한 제장(祭場)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마한 사람들의 수많은 기원과 소생이 담겨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언덕인가?
익산 영등동 제사유적 상상도
영등동 유적에는 당시 발굴조사된 집터 등이 보존되어 있고, 익산탑이 세워져 있다. 언덕의 적당한 자리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1800여 년 전 마한의 입대목현령고를 재현한다면, 21세기 새로운 역사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사시사철 반짝이는 불빛으로 나무를 수놓는다면, 매일 밤마다 그리고 성탄절 주간마다 찾아드는 관광객들의 바람까지 품어줄 것이다.
점점 삭막해져가는 이 시대, 역사기록 한 줄에 의지한 마한의 영등동 제사유적이 새로운 활기로 소생의 기운을 널리 널리 퍼뜨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바람을 임인년 호랑이의 마지막 포효에 실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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