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연구사
'홍재일기'는 기행현이 1866년부터 1911년까지 장장 45년간 쓴 개인일기이다. 기행현의 후손가에 잠자고 있던 '홍재일기'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2012년이었다. 2013년 몇 사람이 모여서 지역사료연구회라는 타이틀을 걸고 '홍재일기'를 읽기 시작하였다. 초서가 많은 편인지라 1차적으로 초서를 조금 배워야 하지 않겠나라는 점에 모두 동의를 하였고 그렇게 서로의 관심사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주제는 일기를 읽는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조금씩 탈초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에 걸쳐서 홍재일기 전체 7책을 탈초하였고, 2022년 번역을 마쳐 출간이 임박했다. 나아가 11월 25일에는 부안교육문화회관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관심있는 사람들의 참여를 바란다.
'홍재일기'를 읽어가면서 시대를 새롭게 이해한다. 개항기 때는 어쩌고, 갑신정변 때는 어쩌고, 그리고 동학이 일어났던 1894년보다 1~2년 전은 특히나 촉각이 곤두서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시선으로 개인의 일기를 보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국정이 돌아가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은 맞겠지만 어떤 면에서 개인은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일기를 대할 때 역으로 개인의 일상에서 어떻게 정치, 사회, 경제, 문화가 녹아 들어있는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홍재일기 1891년 10월 27일 기사에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띈다. 이 날 일기에는 “어제와 같은 날씨였다. 석제(石堤)에 있는 이 승지(李承旨)의 집에 가서 금산 동곡의 서찰을 전하였다. 친구 강씨와 함께 사거리에 갔다. 옆에서 듣자니 순창 피노리(皮老里) 바위아래에서 새로 약수가 솟는 곳이 있는데, 이를 마시면 모든 병에 즉시 효험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대구감영에 변괴가 있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피노리’는 동학과 관련된 매우 역사적인 공간이다. 바로 전봉준 장군이 피체되었던 곳이다. 오늘날 전봉준 피체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회자되고 있기는 한데, 전봉준 장군은 왜 피노리로 갔을까?
전주 화약이 있었던 1894년 5월 8일이후 뚜렷한 행적이 없었던 전봉준은 9월 항일전쟁에 나서기로 하고 9월 14일 전국 각지에 의병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하여 재봉기하였다. 10월 초 삼례를 출발하여 12일 논산에 이르렀고, 23일 공주에 다다랐다. 그리고 24일~25일까지 1차 공주전투, 11월 8일~10일까지 2차 공주전투가 전개되었다. 당시 전봉주 부대 4만여 명이 주력이었고, 기타 농민군을 합하여 약 10만 명에 이르렀지만 공주를 수비하는 농민군 진압군으로 일본군 약200명, 정부군 810명에게 두 차례 전투로 궤멸될 정도였다.
그런데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기 전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과 경군이 격전을 벌였던 5월 3일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과정에서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따라서 전봉준은 전주화약이후 집강소를 순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사이 총상을 치료해야 했다. 그 해 9월 2차 봉기이후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11월 25일 원평에서 다시 싸웠고, 태인으로 후퇴하여 11월 27일 다시 접전하였다. 전봉준이 순창으로 간 것은 12월 1일경이었고, 2일에 정부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혹 전봉준은 옛 부하에게 몸을 의탁하러 간 것이 아니라 고단한 전투와 총상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피노리 약수를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전봉준의 동학 전쟁을 자기가 믿는 부하의 배신으로 대미를 맺는 방식으로 서둘러 정리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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