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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라감영과 전라관찰사

전라감영과 전라관찰사

조선시대 관원들이 근무하는 곳을 관아라 하는데 관아 중에서도 각도의 관찰사(감사)가 집무하는 관아를 감영(監營)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오늘의 전라남․북도 및 제주도를 관할하던 행정구역이었으며 관찰사는 행정, 사법, 군사상의 최고 책임자였다. 전라감사는 민정․군정상의 최고 실권자로서 전라도 통치 행정을 총괄하면서 위로는 국왕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면서 아래로는 전라도 56개 군․현의 수령들을 지휘 통솔하였다. 이같이 전라도 통치 행정을 총괄하던 관찰사가 정령(政令)을 선포(宣布)하던 감영이 있던 전주는 바로 전라도의 수도(首都)이며 정치의 중심지이자 문화 중심지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시기에는 봉건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역사적인 전주화약이 체결되었고, 한국 사상 최초의 농민 통치기관이었던 군․현 단위 집강소 정치시기에 관민협치 집강소의 총본부인 전주에 감영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도의 혁명적인 개혁정치를 지휘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모두 557명의 관찰사가 거쳐갔다.

전라감영에는 전라감사가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한 선화당과 연신당, 감사 가족들이 지낸 내아와 내아 행랑, 비서실장 격인 예방비장이 일하는 응청당, 보좌관 격인 비장들의 집무실인 비장청 등이 있었다.

또 관찰사의 심부름꾼이자 전주대사습놀이 주역으로 알려진 통인들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었다.

전주는 1896년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고 제주가 분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다. 전라감영이 사라진 지 1년 뒤인 1952년 감영 자리에 전북도청사가 들어섰다.

전라감영은 도청사가 철거된 뒤 지난 2017년부터 104억 원이 투입돼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사라진 지 약 70년 만에, 복원 논의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그 자태를 다시 드러냈다.

2020년 10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북과 전남, 제주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이 한국전쟁 때 폭발로 완전히 사라진 지 약 70년 만에 위풍당당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6·25 때 소실된 선화당·관풍각·연신당 등 7개 건물이 바로 그 대상이다.

전라관찰사의 정식 명칭은 전라도관찰사 겸 도순찰사(全羅道觀察使兼都巡察使)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전주부윤(全州府尹)이다. 1468년(세조14년)에 전라도관찰사를 두어 부윤이 겸임해 전주를 통치했다.
 宣化堂(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監司)가 정무(政務)를 보던 감영(監營)의 정청(政廳)을 宣化堂이라 한다. 政廳건물 정면 중앙에 [宣化堂]이라는 편액(扁額)을 달았는데, 이는‘宣上德而化下民(선상덕이화하민)’ 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上德은 임금의 德이며, 下民은 백성이고, 化는 교화(敎宣)의 의미이다. 化堂은 보통명사일뿐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어느 도(道)나 감영의 관찰사 집무청을 선화당이라 칭하고, [宣化堂]이란 현판을 달았다.
반면에 군현(郡縣)의 수령(守令) 사또, 즉 오늘날의 시장 군수들이 정무를 보는 정청은 동헌(東軒)이라 하였는데, 동헌에 걸리는 편액 당호(堂號)는 동네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전남북과 제주도를 총괄하던 전라감영은 아시다시피 전주에 있었다. 그래서 풍남문(南門) 안쪽에 걸려있는 편액처럼 전주를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이라고 했다. 풍남문에서 시내를 향한 도로를 따라 가다 좌편, 현 전북도청이 있는 곳이 예전 감영터로 선화당이 여기에 있었다. 우편은 전주부윤의 집무처, 오늘날로 말하면 전주시청이 있던 자리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1598년 황신이 개건했다. 1771년에 이르러 관찰사 윤동승이 중건했으며, 1792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관찰사 정민시가 다시 지었다. 하지만 1951년 11월 무기로 폭발로 다시 소실됐다.

포정루(八達門)

전주우체국 사거리, 아관원 사거리, 성원오피스텔(구 전주극장), 중앙동 풍년제과 사거리의 4지점을 연결한 4각형의 부지가 전라감영의 관아가 자리했다.
전라감영의 정문은 포정루(布政樓)였다. 포정루는 명견루(풍남문)가 보이는 도청 동쪽 경계와 전주완산경찰서 동쪽 경계를 잇는 경목선도로 중앙지점 즉 전주상공회의소 앞 사거리로 보인다.

 1743년(영조 20년)에 관찰사 조영국이 신축되어 이곳에 신문고가 설치되면서 백성들의 민원을 전라감사에게 직소할 수 있었다.

백성들이 이 문를 지날때는 관리들의 선정을 바라고 아울러 널리 백성들에게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안쪽에는 팔달, 바깥 쪽에는 포정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전주의 중심도시 팔달로 역시 사통팔달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와 함께 전라감영의 출입문이었던 이 포정루에서 기인한다. 1909년 무렵, 2층 누각 건물이 팔달문이며 그 앞에는 32개의 선정비가 있다가 1954년 4월 25일 안길진 전주시장 때 다가공원으로 옮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