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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문화 인문 스토리] 조선시대에 버들상자는 정읍장, 광주리는 고산장에서 판매됐다

[문화 인문 스토리] 조선시대에 버들상자는 정읍장, 광주리는 고산장에서 판매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플라스틱 바구니가 등장하기 이전 한국 대표 생활용구였던 바구니를 중심으로 우리의 생활문화를 살펴보는 ‘엮고 담다: 바구니를 통해 본 한국의 생활문화’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글은 김옥천 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최범석 전 민속연구과 학예연구원, 사진은 선유민 사진각가 참여했다. 플라스틱 사이에서 빛나는 고고한 자연의 바구니 전북 역사를 간추려 소개한다.

△ 조선시대에 버들상자는 정읍장, 광주리는 고산장에서 판매

바구니는 물건을 담아 운반해야 하거나 저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이용된 물건이다. 농사 수확물이나 어획물을 담아나르는 용도, 음식을 저장하거나 말리는 용도, 그리고 옷을 비롯한 집안의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여 정리하는 용도까지 여러 종류의 바구니가 적재적소에 이용되어 왔다. 자급자족의 형태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바구니는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됐다. ‘임원경제지’ 예규지에서는 각 지역에서 개설된 장시와 주로 거래된 물품을 기록했다.
바구니와 관련된 물품을 살펴보면 버들그릇[柳器]은 전국에 걸쳐 판매됐고, 죽물(竹物)은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판매되었으며, 나무바구니[木籠]와 채상은 전라도 담양장, 버들상자[柳笥]는 전라도 정읍장, 광주리[筐篋]는 전라도 고산장에서 판매됐다. 또 일부 바구니는 전문집단이 생산하기도 했다. 버들고리의 경우 재료 수급의 필요성으로 인해 가내에서 자급자족했던물품이 아닌 유랑집단에 의해 전문적으로 제작된 바구니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바구니 제작은 자급자족 물품과 시장경제에 포섭된 상품으로서의 두 형태가 공존하게 되는데, 여타 부업생산품과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농공일치의 자급자족 성격을 띠다가 농가 생산품의 시장판매가 증가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부업으로서의 가내수공업이 분리되어 농촌 수공업으로 발전하는 양상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모든 장시에서 동일한 바구니가 판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상품으로 판매되는 바구니 역시 지역공동체 내에서 소비가 이루어져 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제시대 전주 지역보통학교의 대바구니 제작 수업은 수공과의 교육 목적 충실히 따르다

누구나 바구니제작을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버들세공의 경우 실내작업에 적당한 수공업이었기에 농가부업으로 장려했다. 그러나 가공기술이 매우복잡해 적어도 2년이 경과해야 완전히 작업에 종사할 수 있는 부업이기 때문에 종사자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915년 7월 14일 ‘매일신보’ 보교( 普校) 와 죽세공 기사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전주제일보통학교의 수공과 죽세공은 특히 전과를 치하고 전주 면역소 내 구 관찰당 건물의 일부를 공장으로 전과생(專科生) 5명 및 보통학교 3년생 40명 중에서 선발한 20명을 합하여 교수하는데 작년 11월 차 수공과를 설치한 이래 금일까지 거의 8개월의 차 단시일에 생도 일동은 장족의 진보를 하여 전과생과 같음은 이미 화발, 화병, 반롱, 탄기(炭器) 등 세공이 지극히 어려운 물건을 제작하기에 이르러 이번 가을 경성에서 개최될 시정5년기념공진회에도 출품할터이오, 기성품 수종을 정치하였고 또한 오는 20일 항은 보통학교에서 학예품전람회를 개최하여 일반 유지에게 종람케 하여 의호 분양하리라는데 원료 풍부한 전주에서 전 도를 장려하면 장래는 실로 전주의 특산물로 광히 명을 득하기에도 지하리라.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의 시행과 함께 시작된 보통학교의 수공과 수업 역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부업장려와 맥을 같이한다. 총독 데라우치(時內)가 각 도관립학교에 내린 ‘조선교육령시행에 관한 훈령’에서는 “수공을 수업할 때에 있어서는 적의(適宜)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를 채택하여 이용방법을 이해시켜 그 교수로 하여금 생활의 실제에 패익(稗益, 역할)케 할 것에노력할것이다” 고 밝혔다. 
이를 통해 살펴볼 때 수공과로 하여금 부업생산에 필요한 기술을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이 명확해진다. 앞서 살펴본 전주지역 보통학교의 대바구니 제작 수업은 수공과의 교육목적을 충실히 따르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진안의 강경춘 싸리 광주리를 만들다



싸리는 오래 전부터 우리 삶과 함께해온 식물중 하나이다. 척박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 전국의산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식물이었고, 속이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 여러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남부지방이 대나무로 바구니를 제작했다면 대나무가 보기 드문 한강 이북 지역은싸리를 이용해 다래끼, 채독등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싸리 광주리의 제작은 진안에 거주하는 강경춘(1945~)의 제작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광주리나 채반은 촘촘하게 엮어야 하는 다른재료의 바구니와는달리 비교적 성글게 엮는 것이 특징으로, 튼튼하고 탄력이 있는데다 매듭을 짓지 않고 엮어서 끼우기만해도 잘 풀리지 않는 싸리가 가장 적합한 재료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광주리와 채반의 제작 과정은 거의 유사하다. 몸통을 엮어 오목하게 올리면 광주

리, 눌러 납작하게 만들면 채반이 되기에 광주리 제작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채반까지 만들 수있다.



“ 제작 방법은 잊어버리덜 안 하지. 한 번 내 손에 쓰인 일인디. …… 중략 …… 다른데서 해온 거 보면 손꾸락이 이렇게 푹푹 들어가게 해놨어. 빨리 빨리 한 개라도 더 만들라고 하니께 그래. 아니, 그보다도 솜씨가, 한 번 그렇게 배우면 안돼요. 긍게 인제 이것도 모든 것이 만드는 사람솜씨에 매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혀”

강경춘은 전남 담양군 월산면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대바구니 엮기가 일상인 환경에서 자라왔다. 당시 담양에서는 마을마다 특화된 품목이 있어 여러 품목을 만들기보단 마을 주민 모두가 같은 종류의 대바구니를 만들어 판매했다. 대바구니 제작이 익숙했던 지역에서 성장한 강경춘이 싸리 광주리와 채반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 계기는 그가 16세가 되었을 무렵 그의 동네로 이사온 한노인 때문이었다.

“담양서 노인 양반이 우리 동네를 이사 왔는디 그 양반이 인자, 이것(싸리)을 시작을 했어. 그때는 7~8월 달에 인자 싸리를 비어다 껍데기를 벳겨 안삶고. 하지에 물이 올랐을 때. 그때가 내가 한 열대여섯 살 먹었을 땐께 한 60년 전이라고 봐야지”

싸리제품이 잘 팔리는만큼 담양 내의 싸리 세공품 제작자도 점차 늘어났다. 판로경쟁이 심해졌고 무엇보다 재료인 싸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강경춘은 원료 수급지를 개척할 요량으로 전국을 탐방하던 도중 진안까지 오게 됐다. 진안은 담양보다 산이 많아 싸리가 도처에 풍부했고 무엇보다도 싸리 제품 판매가 원활한 곳이었다. 이에 그는 결혼 직후인 1973년 진안으로 이주하여 살림을 시작하게 됐다. 진안에서 싸리 세공품 제작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판매는 순조로웠다. 당시 혼자서는 판매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마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제작했고, 부인까지 일손을 도와야만 했다. 이렇게 날개돋힌 듯 팔리던 싸리 공예품이었지만, 플라스틱 바구니가 등장하면서 그 기세가 꺾이게 된다. 싸리공예품제작으로는 생계를 유지 할수 없게 된 강경춘은 고속도로 휴게소 건설, 인삼농사등으로 전업(轉業)을 하게 됐다.

나이가 들어 크고 작은 수술을 잇달아 받고난 이후로는 20년이 넘게 생업으로 삼았던 인삼농사도 접고 현재는 소규모 논·밭농사만 짓는다. 그러나 싸리 공예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지금도 소일거리로 싸리 광주리와 채반을 제작한다. 여느 바구니나 마찬가지겠지만 싸리 제품은 손질부터 마무리까지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은 구석이 없다. 싸리를 채취해서 삶고 껍질을벗겨 손질하고 보관하기 위해서는 몇날 며칠을 매달려야 한다. 상대적으로 쉬운 엮는 과정도 어깨가 아픈 지금은 어려운 일이 됐다. 예전 같지 않은 몸이지만 광주리와 채반을 만들 때 만큼은 허투루하지 않는다. 강경춘은 1개의 몸통날에 싸릿대 7가닥을 넣고 몸통을 엮기 때문에 광주리가 견고하다. 그러나 수입산은 1개의 몸통날에 2,3가닥 뿐이므로 몸통이 매우 성글다.

“요거, 요런 것 하는 사람 별라 없을 거야, 사람이 인자 그전에 한 사람들은, 나이 잡순 양반들은 그분들 돌아가시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요거 헐라고 생각을 하덜 않고. …… 중략 …… 우리 동네도 싸리 공예를 하던 노인 양반이 두 양반이나 있었는데 돌아가시고 이젠 없어. 지금 요것도 이 동네서 나혼자뿐이 못혀”

싸리 광주리·채반은 그 쓰임에 비하여 제작자가 많지 않다. 강경춘도 제작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귀촌한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싸리 공예를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힘든 과정을 눈으로 보고 나면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에는 그와 함께 싸리 제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2명 더 있었으나, 이들이 모두 사망한 후에는 강경춘이 이 근방의 유일한 제작자가 되었다. 언제까지 제작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강경춘은 힘이 닿는데까지 싸리 광주리와 채반을 제작하기를 희망하고 있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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