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전주 기령당의 편액과 소장 그림 해석하다

 

전주 기령당이 보존 편액 번역본 기록자료집 제4(발행 이상칠, 편집위원장 신동기, 제작 신아출판사)’를 펴냈다. 1집 기령당 기록자료집, 2집 보존 고문서 번역본 기록자료집, 3집 보존 고문서 번역본 기록자료집 등에 이은 이 책자는 100 여년 동안 보존해 온 편액 50 여점과 소장 작품 등이 한글로 소개됐다.

청산은 물가에 외로이 그대로 서 있고 산빛은 그윽하고 트여 새벽 종소리 청아하네. 좋은 대는 모두 긴요한 데서 나야 마땅하고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한 집에 같이 사네. 특이한 꽃은 대부분 때가 있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구름 그림자는 가로질러 달려 은하수와 합하네이는 건물의 주련(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 삼아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에 쓰인 문구다.

박병연 전 당장이 1983년 신정에 지은 호남시도 흥미를 더한다. ‘높은 산(高山) 위에 익산(益山)이 있으니 어느 누가 여산(礪山)을 녹록하게 여길까. (중략) 봄 구름에 호랑나비 남쪽 언덕(南原)을 날고 가을날 기러기 해남(海南)에서 부르짖네

1957년 효산 이광열이 쓴 송석정기(松石亭記)’는 유당 김희순이 현금 10만환. 주지 김현성이 현금 10만환을 기부해 지어진 바, ‘늙은 소나무와 기암괴석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표현했고, 또한 두 사람이 소나무처럼 오래 살고 바위처럼 강건하기를 축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전주 기령당은 426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다. 기령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으로 전주 완산동 군자정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예로부터 전라관찰사나 전주 부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으로 지금도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정치인과 기관장들이 어르신들의 덕담을 듣기 위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기로연은 조선시대 때 임금이 퇴임한 관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들에게 베풀었던 잔치에서 유래된 행사로, 지역의 목민관들은 해마다 연회를 열어 노인공경을 실천했다. 전주 기령당에서도 기로연의 전통이 단오절에 유지되어 왔으며, 사단법인 전북전통문화연구소에서 전통문화의 보전과 계승을 목표로 지난 2009년 기령당에서 기로연을 복원 재현한 바 있다.

기령당의 기원은 지금의 용머리 고개 동쪽에 지어진 군자정(君子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 함락으로 관련 문서가 전부 소실돼 정확한 건립 연도를 파악할 수 없어 1597년부터 운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군자정에서 나이 많은 전주 유지들이 활을 쏘며 친목을 다졌는데 이를 기령당의 시초로 보고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67년 민가에서 발생한 불로 전주부성 내 1,000여 가구가 불에 탔다. 이때 군자정까지 소실됐다. 마침 불어닥친 광풍에 군자정 현판이 날아가 현재 기령당이 위치한 장소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기이한 징조로 판단, 여기에 정자를 다시 세운다. 이후 군자정은 다른 정자와 합정(合亭)됐고 이로 인해 사유지로 넘겨져 절로 바뀌었다. 다만 군자정이 맡은 경로당 역할은 1899년 부사청사(府使廳事) 건물로 옮겨져 양로당이란 편액을 걸고 계속됐다. 전라관찰사 조한국과 군수 이삼응의 보조로 운영돼다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관청 건물이 환수돼 부동면 오계리(현 풍남동)로 옮겼지만 유지가 어려워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21년 진사 이건호가 완산동의 가옥을 기증해 현재의 기령당이란 이름으로 고쳤고 1949년 지역 부호 인창섭이 절로 사용되던 군자정터를 매입, 기증하면서 현재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