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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흥부의 매품팔이

 

 

흥부 아내는 이 말에 순종하여 서로 나가서 품을 팔았다. 흥부 아내는 방아 찧기, 술집의 술 거르기, 시궁발치의 오줌 치기, 얼음이 풀릴 때면 나물캐기, 봄보리를 갈아 보리 놓기, 흥부는 이월 동풍에 가래질하기, 삼사월에 부침질 하기, 일등 전답의 무논 갈기, 이집 저집 돌아가며 이엉 엮기, 궃은 날에는 멍석 맺기 등 이렇게 내외가 온갖 품을 다 팔았다.

품팔이는 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 주는 일을 말한다. 흥부의 아내는 방아 찧기, 술집의 술 거르기, 시궁발치의 오줌 치기, 나물 캐기, 봄보리 갈아 보리 놓기 등의 일을 했다. 흥부도 이월 동풍에 가래질하기, 삼사월에 부침질하기, 일등 전답의 무논 갈기, 이집 저집 돌아가며 이엉 엮기, 궃은 날에는 멍석 맺기 등의 일을 했다. 그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품일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자본이 있지 않은 이상 돈을 모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 결국 흥부는 매를 맞아 30냥을 얻는 매 품팔이까지 하게 된다.

 

나랏곡식 얻을 생각 말고 매를 맞으시오. 고을 김부자를 어느 놈이 영문에 없는 일을 꾸며 고소했소. 김부자를 압송하라는 공문이 왔는데 김부자는 마침 병이 나고 친척도 병이 있어 누구를 대신 보내고자 찾고 있소. 연생원이 김부자 대신 영문에 가서 매를 맞으면 그 값으로 돈 삼십 냥을 줄겁니다. 그 돈 삼십 냥은 예서 증서를 줄테니 영문에 가서 대신 매를 맞고 오는 것이 어떻소?”

 

흥부는 삼십 대를 맞는 댓가로 30냥을 받게 된다. <흥부전>에서 조선시대 30냥을 체감해볼 수 있는 문장이 존재한다. 30냥이면 10냥으로 고기를 사고 10냥으로 쌀을 사 포식하고 열 냥으로 소를 사서 스물 넉 달 배내기를 줄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임을 알 수 있다.

흥부는 김 좌수 대신 30냥을 받고 감영에 매를 맞으러 갔으나 마침 나라에서 죄인을 석방하라는 사면령이 내려져 그나마 매품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청성잡기에 실린 어리석은 사람이 맞은 매는 곤()과 태·장의 매이다. 7대는 엽전 다섯 꿰미, 100은 엽전 일곱 꿰미의 값으로, 맞는 부위가 넓적한 면적의 매인 곤이 회초리인 장보다 훨씬 무겁고, 집장자(執杖者)에 따라 맞는 매의 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매를 대신 맞는 사람이 받는 돈을 매 삯이라고 한다면 죄에 대한 벌을 대신하는 돈은 속전(贖錢)이다. 두 경우 모두 죄를 지은 사람이 신체적 벌을 면한다는 점에서 같은데 속전은 흠휼(欽恤)하는 차원에서 허용되었던 제도로 경전과 법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채찍은 관부(官府)의 형벌로 정하고 회초리는 학교(學校)에서 교화시키는 형벌로 정하되, 황금으로 속죄하도록 하셨다.[鞭作官刑, 扑作敎刑, 金作贖刑.]”고 하였다.

대명률(大明律)』 「명례율(名例律)오형(五刑)’조에도 역시 태부터 사형까지 오형에 대한 속동전(贖銅錢)의 규정이 있으며, ‘노소폐질수속(老小癈疾收贖)’조에서는

 

나이 70세 이상이나 15세 이하 및 폐질(廢疾)인 사람이 유죄(流罪) 이하의 죄를 범하면 수속(收贖)한다.[凡年七十以上, 十五以下及廢疾, 犯流罪以下, 收贖.]”고 하였다. 조선에서도 실정에 맞게 속전을 정하여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잡령(雜令)조 에 ", , , 유형의 속목[笞杖徒流贖木]”

규정을 마련했다.

경전과 법전에서 속전을 허락한 것은 어디까지나 흠휼이 목적이다. 추위와 무더위에는 강상(綱常)과 장도(贓盜)를 제외하고 수속(收贖)하여 장을 면하게 하는 것이 제왕의 흠휼하는 인덕(仁德)이라 보았다. 장형을 받아 병이 중하게 되면 목숨을 잃을까 염려되므로 형신을 하지 않고 장형을 속전으로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죄를 지은 사대부와 관료들에게도 속전이 허용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추단(推斷)’조에, “문관과 무관, 내시부의 관원, 유음자손, 생원과 진사가 십악, 간음이나 절도, 불법적인 살인, 법을 굽혀 장물(贓物)을 받는 죄를 범한 경우 이외에 태와 장에 대해서는 모두 속전을 받도록 한다.[文武官及內侍府有蔭子孫生員進士 犯十惡奸盜非法殺人枉法受贓外 笞杖竝收贖]”고 하였다. 즉 속전은 원래 흠휼의 목적에서, 그리고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刑不上大夫]’는 이념 하에 시행된 제도이지만 결국 사대부, 관리, 일반 서민 모두에게 형벌 면제의 방편이 됐다.

조선에서 속전이 특히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속전이 법사 하례(下隷)들의 실질적 급료였기 때문이다. 평균 80~100여 명에 달하는 죄수들을 관리해야 했던 형조의 실무 담당 서리들과 이례(吏隸) 기백 명 중에 일부 수료(受料) 서리를 제외한 대부분은 요포(料布)가 없었다. 따라서 법사의 하급 서리, 이례들은 스스로 알아서 속전을 거두어 먹고 살아야 했다.
속전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징수되었다. 장배(杖配)의 형벌을 면해주면서 받는 속형(贖刑)과 금령(禁令)을 통한 속전 징수이다. 조선 초기에 저화(楮貨)의 유통을 위해서 태, 장의 수속을 허용한 뒤, 실제 형벌 집행보다는 태속(笞贖), 장속(杖贖)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형조, 한성부 등 법사는 한 달에 여섯 번 허용되었던 출금(出禁)에서도 속전을 거두어들였다. 우마도살(牛馬屠殺), 주금(酒禁), 난전(亂廛), 무녀(巫女)와 신사(神祀), 노름이나 도박과 같은 잡기 등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단속하였고 발각되면 속전을 거두었다.

이렇게 거둔 속전의 대부분은 서리, 대솔, 하인들의 삭하(朔下) 비용으로 지급되었는데 속전 액수에 따라 이들의 급료가 나누어졌다. 한 달 급료가 속전 징수 성과에 달렸으므로 이례들이 속전을 거두어들이는 데 얼마나 가혹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청성잡기에서 형조(刑曹)가 받는 장 100에 대한 속전이 일곱 꿰미이고 대신 장을 맞는 자가 받는 액수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즉 매 삯이 속전보다 싸지 않았고 법사에서는 반드시 속전을 받으려 하였으므로 매품을 사는 것보다 속전을 납부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거나 죗값을 돈으로 대체하는 불합리함이 통상적으로 행하여졌는데, 이는 형정 운영이나 형벌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형(失刑)’이었다. 그러한 불합리를 합리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진보이다. 현재 우리는 죄에 대한 벌로 신체를 때리는 일도, 대신 매를 맞는 일도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죄를 대신하는 일도 사라졌는가에 대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이 상대부(上大夫)하는, 즉 예외 없이 형벌이 대부에까지 미치는 사회, 아직은 과제인 듯하지만 그래도 기대해 본다.(도움말 조윤선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