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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이종근의 행복산책2]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이종근의 행복산책2]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세밑의 밤, 시멘트 바닥에 뉜 몸은 영락없이 육중한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새벽 시장 동태가 됩니다.

주린 이내 몸은 도시를 떠도는 유령이 됩니다. 시나브로 다리 밑에 매달린 고드름이 짤그랑거립니다. 초저녁부터 내린 눈은 발등을 덮습니다.이것이 카시미론 이불이라면 잠 좋겠습니다.

'노숙자(露宿者)'는 길에서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길 로(路)가 아닌 이슬 로(露)를 쓰니 노숙자(露宿者)입니다.

이는 '풍찬노숙(風餐露宿)'에서 온 말입니다. 바람 먹고 이슬 덮고 잔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노숙자는 물결(浪) 따라 떠도는(浮) 부랑자(浮浪者)나 놈팡이로 전락했습니다. 놈팡이는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룸펜(lumpen)에서 왔습니다. 룸펜이 일제강점기에 우리한테 전파되어 놈팡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풍찬노숙'은 '바람막이도 없는 곳에서 밥을 먹고 지붕도 없는 곳에서 이슬을 맞으며 잔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도 없이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숙야인가시(宿野人家時)'중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고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으니 허물인지 알지 못하겠구나(露宿風餐未也)'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도 있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생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노(餐)'자는 갑골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전(小篆)을 살펴보면 의미요소로 '먹다'의 뜻인 식(食)과 발음요소인 (찬)이 더해진 형성자로, 뼈를 추려서 맛있게 먹는다는 데서 '먹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음식' '간식의 뜻은 파생됐습니다. 금문(金文)에서는 찬(湌)으로 쓰였지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고초를 알까요. 때로 세상의 풍정을 알려면 온갖 시름 걷어내고 만행의 길에 오르는 것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은 한편으로 큰 뜻을 세우려는 사람이 온갖 만행의 고초를 겪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따라 시멘트 바닥이 더 찹니다. 라면박스 위에 홑이불을 깔았으나 그래도 냉기는 맹렬하게 솟구쳐 오릅니다. “견딜 만한가? 어째 몸이여!” 답이 없습니다.

무릎이 턱에 닿도록 웅크려봅니다. 어금니에서 쇳소리가 납니다. 갈비뼈 사이로 전기톱이 깊숙이 들어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동침을 노리던 찬 바람이 파고듭니다. 너무 추워 사타구니로 파고든 손이 견디다 못해 콘크리트 바닥을 사정없이 내칩니다.

흔히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부른 이승일 때의 얘기입니다. 차디찬 컵라면 국물로 아침을 건너는 천한 이승은 개똥밭도 아닌 살아 있는 저승입니다.

미래 없는 노숙은 서럽습니다. 그러나 노숙자라고 해서 기도의 슬픔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김재남. 한국일보 2022년 1월 18일자 내용이 일부 들어간 가운데 글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