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스토리

고창의 호랑이 이야기

 

호랑이가 된 남자

 

호랑이가 된 남자는 고창군 성송면에서 호랑이가 된 사람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는밤에는 호랑이, 낮에는 사람으로 살던 정생원이 부인에게 들켜 다시 사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호랑이로 살게 되었다는 동물담이다. 이를 호랑이로 둔갑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밤이면 밖으로 나갔다가 날이 새면 들어왔다. 그 사람의 부인은 남편이 들어오면 이상한 냄새가 나서 무슨 까닭인지 궁금하였다. 어느 날 한 밤중이 되니 남편이 나갔다 온다고 하며 집을 나섰다. 부인이 뒤를 쫓아 조용히 엿보는데 짚더미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가서 책을 빼서 보더니 차근차근 호랑이로 변해서 짐승들을 잡아먹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날이 새자 다시 책을 보며 사람이 되어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남편이 호랑이로 변신하였을 때 책을 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책을 없어진 것을 알고는 부인과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호랑이가 산으로 올라간 후, 봄이 되어 부녀자들이 나물을 캐러 산에 갔을 때 호랑이가 굴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부녀자들은 놀라 저 호랑이가 정생원이라고, 정생원이 저렇게 되었다고 하며 나물 바구니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에 호랑이가 나물 바구니를 물어다 각각의

부녀자 집 앞에 놓아주고 영광의 굴수산으로 옮겨 갔다. 그 호랑이를 장포수가 잡았다는 말이 전한다.

 

호랑이 굴에서 태어난 아이

 

호랑이 굴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장면에서 호랑이 굴에서 탄생한 아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어느 약사 부부가 호랑이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고, 명당자리에 묘를 써서 아들이 정승까지 되었다는 인물담이자 풍수담이다. 이를 호랑이 굴에서 낳은 아이라고도 한다.

 

병 고쳐준 약사에게 보은한 호랑이

 

병 고쳐준 약사에게 보은한 호랑이은 고창군에서 약사와 호랑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빼내 주는 황약사의 시은담이자, 그 은혜를 갚고자 동삼 두 가마를 주는 호랑이의 보은담이다. 이를 백약이 무효라고도 한다.

 

왕자굴

 

왕자굴은 아산면 운곡리 화시산[화시봉] 서쪽에 있는 동굴이다. 왕자굴은 원래 호랑이가 살아서 호랑이굴로 불렸다. 그런데 신라 왕자가 난을 피해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백제 땅 고창 선운산 건너편의 화시봉에서 호랑이를 몰아내고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다. 왕자굴이 있는 화시봉에는 왕자가 가마를 타고 오르다가 투구를 벗어 놓은 투구봉[일명 시루봉], 병졸들이 가마가 무거워서 내려놓은 가마바위[일명 상여바위], 어두운 밤이 되자 촛불을 켜 놓은 촛대바위 등의 명소가 있다. 왕자굴은 화시봉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왕자굴 서쪽에는 굴산도요지와 선운산 컨트리클럽과 선운산 도립공원· 주진천[인천강], 동쪽에는 화시봉 정상, 남쪽에는 운곡저수지와 오베이골 생태길,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 유적지, 북쪽에는 국도 22호선과 지방도 734호선이 만나는 소굴치가 있다.

 

호랑이별명을 가진 김찬업

 

개항기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김찬업(金贊業)은 지금의 흥덕면에서 태어났으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역시 명창으로 이름난 김수영(金壽永)이다. 오끗준의 생질(甥姪)이다. 동편제 소리의 거장으로 다섯 마당 판소리에 모두 능하였다. 김찬업은 박만순(朴万順)과 김세종(金世宗)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김세종의 영향으로 이론에 밝았고, 정창업(丁昌業) 등 당시 명창들의 소리를 적절히 하였다고 한다. 동편제(東便制) 전통의 고상한 판소리를 하여 이면(裏面)을 깊이 아는 소리꾼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목소리가 상하여 소리를 그만두었다. 눈빛이 빛나고 목소리가 종소리와 같이 커서 별명이 호랑이였다고 한다.

 

호랑이 등을 양각한 무장객사 돌계단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고창 무장객사의 돌계단은 돌계단에 호랑이, 구름무늬 등을 양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무장객사는 전북 유형문화재다.

 

호랑이가 사슴을 물고와서 바친 효감천(孝感泉)

효감천

 

 

효감천(孝感泉)은 신림면 외화리에 있는 조선 시대 우물이다. 조선시대 인물 감천 오준(吳浚)[1444-1494]의 효가 지극하여 유림들이 추모하는 의미에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효감천이다. 또한 유림들은 사당을 짓고 사당 명칭을 의논하던 중에 벌레가 대나무 잎에 창효(彰孝)’라는 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보고 창효사(彰孝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효감천은 198038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됐다. 하늘이 감동하여 만들어준 샘이라 하여 고을 현감이 석축을 쌓았다고 전한다. 가로 137, 세로 129, 깊이 170의 우물이다.

인근에 정려각, 비석에 새겨진 그림, 사당 창효사와 감천선생 묘소가 있다. 오준의 후손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과 10월 보름에 제를 지낸다. 또한 4월 초엿새, 8월 초엿새에는 효감천을 청소한다. 이곳에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호랑이가 사슴을 물고와서 바치니 삭망치전에 제수가 풍족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