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기사 작성: 이종근 기자 - 2019.05.12 16:26
진안군 상전면 원월포리마을의 불어난 계곡물은 이 땅을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르다.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는다. 그대여!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하늘닮은'사람들의 희망, '하늘담은' 전라산천에 눈길 한번만 주시기를. 엄동의 바다, 윤슬(잔물결)은 더 찬란하고 이내 삶은 뜨거워진다. 당신이여! 장식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귀밑 수줍은 바람의 미동마저 한없이 고마워하는, 풋풋한 삶이고 싶다.
김학곤화백은 용담댐 건설로 물에 잠긴 고향마을의 풍경을 서정적인 색채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중국 무주촌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담아내는 등 기록화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을 제작, 지역사회에 의미있는 질문을 던져온 작가다.
특히 실향의 고통을 부채(負債)처럼 안고 살아가는 작가는 화선지에 오감(五感)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대바람소리며, 토끼떼들이 무리지어 노닐었던 언덕배기며, 그리고 사람들의 수런거림 등이 잔뜩 묻어나는 풍광등을 응축해 선보이고 있다.
작가의 작품엔 유난히 설경 속 흑염소가 많이 등장한다. 굵고 오래된 노란잎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이 모여있는 염소들의 모습에서 웬지 모를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군집생활을 하는 흑염소는 가족애를 상징한다. 흑염소가 거니는 시골의 정감있는 풍경과 가족간의 끈끈한 정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아픔을 겪게 되는 가정이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러다보면 가족 사이에 미움과 분노가 쌓이기 마련이다. 시나브로, 흑염소가 흰 눈밭을 탐색하는 용담 풍경이 작가의 붓끝에 잡혀 애잔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그, 풍경은 오히려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데다 시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다만, 지는 석양빛이 아무리 슬퍼도 저 감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바라볼 일이다. 용담댐 수몰 뒤 뿔뿔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도 함께 웃고 울던 마을공동체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이랄까.
임실군 운암면 어느 길가에서 풀을 뜯던 흑염소가 기척에 놀라 해안절벽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다. 기다림이나 그리움의 색깔은 무채색이다. 하지만 당신이 들려주는 늦봄의 색깔은 전혀 어둡지 않다. 당신이 떠난 그 겨울 자리에 저기 저 바람으로 남아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흑염소떼가 노니는 풍경은 고향에는 아직도 생기가 있음을 보여주는 오늘에서는. 네 다리가 튼튼하니 바위도 둑도 한 번 뜀질로 넘는 모습이 퍽이나 그리웁고나. 다음달 2일까지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모모아트갤러리에서 열리는 김화백의 개인전 자리의 염소를 보면서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해본다.
/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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