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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전북의 가사문학



조선 성종조 정극인은 정읍 칠보를 배경으로 한 가사의 효시작 '상춘곡', 단가 '불우헌가', 경기체가 '불우헌곡'을 창작하였다. '상춘곡'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미학 속에 조선조 사대부들의 유교적 스토우어시즘(stoicism)의 풍류를 엿볼 수가 있고, 단가형의 '불우헌가'는 돈독한 군신간의 윤리와 철학이 담겨있다. 경기체가형의 '불우헌곡'은 전원생활의 흥취와 후진교육의 즐거움, 벼슬세계에서 자신의 진퇴와 성은(聖恩) 등을 읊었는데, 이 둘의 장단가가 한데 어우러진 작자의 철학과 풍류가 '상춘곡'에서 종합되어 드러난다.


이들 작품은 정극인을 흠모하고 사숙(私塾)했던 면앙정 송순에게 이어져 가사 '면앙정가'를 낳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짐으로써 호남가단을 이루어 조선가사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장수출신 장현경은 정조 20년에 삼례역승으로 좌천되자, 정철의 사미인곡처럼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군류의 가사 '사미인가'를 창작하였다. 그리고 완주 봉동의 규방가사 '홍규권장가'와 '상사별곡', 고창군 대산면의 '치산가'로 이어지면서 고종조 진안 마령의 이도복이 마이산 구곡의 절경을 노래한 '이산구곡가'에 이르렀다.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 만든 가사 ‘완산가(完山歌)’를 알고 있는가. 이를 바탕으로 전주의 명소를 역람하는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도 있다. 특히 ‘완산가’에는 19세기 당시 문인들이 전주의 유적과 명승을 둘러보는 순서가 반영되어 있다. 지리적 배치와 풍류가 반영된 이 루트를 따라 전주를 가장 인상 깊게 둘러볼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으로 활용 가능하다.

민주현은 1854년 47세의 나이로 전주 조경묘(肇慶廟) 별검(別檢)에 제수, 빈 재실(齋室)을 지키면서 무료히 나날은 보내게 됐다. 그러던 중 이듬해 봄에 현령 정의관(鄭義觀), 참봉 이봉현(李鳳賢), 진사 최현우(崔顯宇) 등 몇몇 벗들과 함께 완산의 승경인 한벽당, 만경대(萬景臺), 옥류동(玉流洞) 등을 구경하고 돌아와 1856년에 완산의 풍물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완산가’를 지었다. 이는 한문 고사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문학사적으로 볼 때 가사문학의 쇠퇴기에 나타난 귀족·양반가사로서 고아(古雅)하고 품격 높은 작품의 하나다.

전라도 동복(同福) 사평리(沙坪里, 현재 전남 화순군) 출신인 그는 29세에 향시(鄕試)를 거친 후 44세가 되던 1851년에 문과 병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벼슬길은 승문원과 춘추관에서 시작했으나 외직인 조경묘(肇慶廟) 별검(別檢)에 제수되어 3년간 전주에 머물렀다. 비교적 한직(閒職)인 조경묘 별검으로 있는 동안 그는 전주의 사적과 명승을 둘러보며 그 감회를 여러 편의 한시로 지어 남겼고, 1856년 ‘완산가’라고 제한 200구 가량의 가사를 지어 후손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자기가 품은 경륜을 펴보지도 못한 채 재실을 지키는 별검으로 밀려나자, 그 답답한 심정을 이 작품 속에 은연중 표현했다.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 ‘완산가’는 비록 현직 관원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유배가사 또는 은일가사(隱逸歌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완산의 승경과 풍물, 별검생활의 외로움과 향수, 결사 등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락은 먼저 북도 이남 제일강산인 완산의 기린봉(麒麟峰)·발봉(鉢峰)·이목대(梨木臺)·오목대(梧木臺)·완산칠봉(完山七峰)·건지산(乾止山)·곤지산(坤止山)·장군봉·투구봉 등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곳들에 대해 노래한다.



'구경 가새 구경 가새

완산부(完山府) 구경 가새

북두이남(北斗以南) 제일강산

풍기(風氣)도 조흘시고

기린봉 솟앗난대

발봉(鉢峯)도 둘너 잇다

절피남산(節彼南山) 유석암암(維石巖巖)

어인 호승(胡僧) 쟝재 선고

왼편에난 이목대오

올은편엔 오목대라

뾰죽뾰죽 완산칠봉

울울총총(蔚蔚蔥悤) 가기(佳氣)로다

건지산은 북에 있고

곤지산은 남에 잇다

장군(將軍)은 어대 가고

투구 벗어 봉(峯)에 둔고(1~16구)'



'호승(胡僧) 장자(長子)'는 승암(僧巖)을 의미하며, 그 형세를 시경 '절피남산(節彼南山) 유석암암(維石巖巖)'의 일절을 가져와 표현했다.

마지막 두 구는 완산칠봉 장군봉과 투구봉을 다루고 있다. 민주현은 장군은 어디 간지 모르겠고, 그가 벗어 놓은 투구만 봉우리에 남아 있다 해서 두 지명을 묘미있게 엮었다.

이어 한나라의 발흥지인 풍패(豊沛)와 같이 조선조의 발흥지인 완산의 사적, 옥류동·한벽당을 거닐고, 만경대·공북루(拱北樓)·만화루(萬化樓)를 대상으로 지은 시들을 읊는다. 그리고 십리에 걸친 덕진지(德津池)의 연꽃과 남쪽 시냇가에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 등 완산의 풍물을 노래했다.

‘가소(可笑)롭다 나의 행적(行蹟)/가소롭다 부세공명(浮世功名)/남아(男兒)의 경제대업(經濟大業)/치군택민(致君澤民) 하렷든이/뜻과 같이 못할진대/부운부기(浮雲富貴) 경영(經營)하랴’

제2단락은 주로 자신의 심회를 읊고 있다. 자신을 신선에 비겨 선인이 이 세상에 귀양살이 내려와 성인의 학문(유학)을 독실하게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에 이름을 울리었으나 재관으로 밀려와 외롭게 지내고 있음을 한탄한다.

제3단락은 “나 일즉 산인(山人)으로 그 뜻이 간절(懇切)하나/명시(明時)를 마침 만나 참아 영결(永訣) 못하온이/기산영수(箕山潁水) 숨은 사람 이 내 종적 웃지 마소/나도 언제야 소원(所願)을 약간 갑고/급류(急流)에 물러나 벽산(碧山)에 깃들일가 하노라” 라고 노래하고 있다.

‘완산가’에서 그는 기린봉, 발봉(鉢峰), 이목대, 오목대, 완산칠봉, 건지산, 곤지산, 장군봉(將軍峯) 등이 펼쳐진 전주의 지세에 대해 언급하는가 하면 전주가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였다가 조선의 풍패지향이 되기까지의 내력, 호남 제일의 고장으로서 전주가 지니는 위용에 관해서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어 ‘옥류동(玉流洞) → 한벽당 → 남고사(南固寺) → 만경대 → 동고사(東固寺) → 서고사(西固寺) → 공북루(拱北樓) → 만화루 → 덕진지’의 순서로 자신이 역람했던 공간의 풍경을 묘사하고 그에 따른 감흥을 표출했다.
규방가사작가 소고당(紹古堂) 고단(高단)여사의 가사문학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소고당 고단 여사 가사비 제막식'이 2007년 5월 22일 오전 산외중학교 교정에서는 소고당 여사의 가사문학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소고당 고단 여사 가사비 제막식'이 정읍시 산외중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제막식에는 고단여사(85)와 남편 김환재옹(87)을 비롯한 가족들과 소고당 고단여사가사비건립추진위원회 김연위원장(태산선비문화보존회장), 그리고 진춘섭 정읍시부시장, 정창환 정읍시문화원장 등 정읍시 각계 주요 인사들,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와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 등 관련 문학인 등 2백여명이 참석해 가사비제막을 축하했다. 장흥에서도 김석중 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이 참석했다.
고단여사의 가사비는 여사의 두번째 가사비에 해당한다.
여사의 친정인 장흥군 장흥읍 평화마을에서 지난 2003년 6월 5일 여사의 가사비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이번 고단여사의 가사비는 그동안 가사문학 특히 규방가사의 맥을 이어오면서 이번 가사비 전면에 새겨진 '산외별곡' 외 60여 편의 가사를 창작하는 등 우리나라 가사문학계에 족적을 남긴 호남가단의 큰 별 소고당 고단여사의 가사문학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제막된 것.
이어 2013년 소고당 고단(1922-2009)의 규방가사 작품선집 '평화사시사'가 간행하게 됐다.
소고당 고단은 장흥읍 평화리 출신으로 규방가사의 장르에 혼신의 열정을 바친 이 시대 최후의 규방가사 작가로 회자, 생전에 100여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전통의 부덕을 도덕으로 삼아 엄격한 자기 절제의 철학을 실천해 끊임없는 창작의 열정으로 규방가사의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했다.

사진은 장흥신문이 저작권 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