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국화는 사양하는 정신에 가깝다.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온갖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투지만 (중략) 국화는 입 다물고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이 마음을 다한 후에 홀로 피어 풍상에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지 아니한가. 동산에 이름없는 꽃들이 많다.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다. 꽃에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중략) 내가 어떤 꽃에 사랑을 느낄 때, 그 꽃의 이름을 모르면 어떠하랴. 그 꽃에 대해 사랑할 만한 게 없다면 이름을 지을 필요조차 없겠으나, 그 꽃에 사랑할 만한 게 있어 그 사랑을 느꼈다면 구태여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는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의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에 실린 글이다. ‘이름이란 구별짓기 위한 것이다. 만약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면 대소 장단의 크기, 청황적백의 색깔, 동서남북의 방위 등 어느 것 하나 이름 아닌 게 없다. 이것, 저것이라는 지시어도 이름이며, 명칭이 없어 무명화(無名花)라 부르는 것도 이름이다. 부질없이 이름을 지어 꾸밀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황윤석, 위백규와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꼽히는 여암 신경준. 순창 태생인 그는 고향에 피고 지는 꽃들의 모양, 생태, 일화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순원화훼잡설’이 그것이다. 순창읍 남산마을에 있는 누정 귀래정(歸來亭)을 세운 사람은 신말주였다. 하지만 후손 중 출세한 인사 대부분은 대대로 한양에서 생활했다. 귀래정에는 어쩌다 들렀을 뿐이다. 그후 8대가 지나 신선영이라는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와 귀래정에 다시 살게 됐다. 동쪽 바위 언덕에 새로운 누정을 짓고 못을 팠으며, 못 안에 섬 셋을 두었다. 또 여러 기이한 바위를 모으고 온갖 꽃을 구해 심었다.
그는 이를 ‘순창의 정원’ 순원(淳園)이라 했다. 신경준이 순원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살았다. 그 역시 학업과 벼슬로 인해 자주 고향을 비웠지만, 조부가 조성한 정원의 꽃나무를 사랑해 여러 꽃의 특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에 대한 고증을 겸해 단상을 붙였다. 그 기록이 바로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린 ‘순원화훼잡설’이다. 연꽃, 난초, 국화, 매화, 복숭아꽃, 철쭉, 작약, 앵도화, 모란, 무궁화, 백화, 석류, 접시꽃, 영산홍, 옥잠화, 장미, 산수유…. 그러나 조밥나무(常山)ㆍ사계화(四季花) 등 이름이 생소한 꽃도 있었으며, 목가(木茄)ㆍ명사(榠樝)ㆍ면래(眠來)ㆍ어상(禦霜)처럼 어떤 꽃인지 알 수조차 없는 33종의 꽃이 기록돼 있다. 이조차 신경준이 보았던 꽃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당시 순창에 얼마나 많은 꽃이 피었는지 짐작이 간다. 꽃이 귀한 여름 한 철 붉은 꽃을 연달아 피어 올리는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한다. 신경준은 〈순원화훼잡설〉에서 자미화를 ‘절도 있는 꽃’으로 예찬했다.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는 최근들어 섬진강학술세미나를 통해 ‘순원화훼잡설’의 향토문화자원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전통 정원인 남원 광한루원처럼 순창의 정원 콘텐츠 활용을 기대한다. 순원화훼잡설을 통한 축제 등 콘텐츠 개발이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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