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으로 들어갔다. 충절을 지키고자 한 행동이다. 일제강점기, 매하 양태승은 속리산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당시 북에는 오산고보, 남에는 고창고보가 있어서 ‘북오산 남고창’이라 했다. 일제는 위안부와 학병 동원에 교사와 지식인을 앞장세웠다. 해직당하지 않으려면 창씨개명을 하라고 핍박했다. 그러나 고창고보를 세운 양태승 선생은 “굶어죽을지언정 창씨개명은 못한다”며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매하 양태승 평전’이 출간되고, 201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된 일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달이 머무는 정자’ 상월정(上月亭)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매하 양태승, 가인 김병로,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등 전북 관련 인사들을 더 크게 만든 곳이다. 상월정은 정자라기보다는 절의 느낌이 강하다. 원래 이곳은 고려 경종때 창건된 대자암의 절터로 후에 사라졌다. 1457년 폐사지에 김자수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그 터에 상월정을 창건했다. 그 후 정자는 함평이씨 덕봉 이경에게 양도됐고, 이경은 학봉 고인후에게 다시 양도함으로써 김, 이, 고 3성과 기연을 지니게 됐다. 춘강 고정주가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 상월정을 영학숙, 창흥의숙, 창평학교로 거듭 발전시켰다고 한다. 상월정에 영어를 가르치는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했다. 운영이 여의치 않자, 읍내에 창흥의숙을 설립, 신학문을 가르쳤다. 창평초등학교 전신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담양 창평은 예로부터 산수 좋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산수와 벗하며 국문학 발전의 한 축을 형성하기도 했다. 또 양녕대군이 이곳으로 낙향했을 때 함께 동행한 궁녀들에 의해 전수되었다는 창평 쌀엿은 오늘날에도 그 유명세가 대단하다. 뿐만 아니다. 담양 창평을 흔히 '인물의 고장'이라고 불린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유학을 숭상한 고을로 국무총리를 비롯, 대법관, 국회의원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다. 앞서 송강 정철은 관직을 버리고 창평으로 낙향해 가사문학의 백미인 「성산별곡」과 「사미인곡」등 수많은 가사 작품을 남겨 국문학사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상월정은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었으며,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용운지에서 등산로를 따라 숲의 향기를 맡으며 걸어가면 창평 인재의 요람인 상월정이 나온다. 고하 송진우를 비롯,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전 부통령 김성수, 전 국무총리 이한기, 고재필 등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니, 명당 중의 명당인 셈이다. 전남에 전북의 피와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이종근(삽화 새전북신문 정윤성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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