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남원 요천 빙고(氷庫)

 

완산동 시외버스정류소 옆에 세워져 있는 우리 마을 빙고리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현 완산동은 조선시대 부남면(府南面)의 은송리(隱松里)곤지리(坤止里)와 부서면(府西面)의 빙고리(氷庫里)이다. 빙고리는 조선시대 전주천의 얼음을 보관해 놓은 굴이 있던 곳으로, 이 동네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임실 얼음창고는 현재 2곳이 남아있다. 관촌역 앞 1, 바로 인근 시기마을에 2개 동이 바로 그것이다. 인근 공덕마을에도 1개 동이 있었지만 도로공사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는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의 설명이다.

백두대간 견두지맥의 빙수봉(氷水峰, 135m)은 정유재란 때 남원의 덕음봉, 향교산, 기린산과 함께 왜적이 군막을 치고 아군과 결전을 벌였다가 패한 곳이다. 빙수봉 아래 요천 변에는 조선시대에 얼음 굴로 사용했던 남원 빙고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빙수봉에는 1971년 불의의 열차사고로 남원에서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사망한 남원초등학교 학생 15명과 승객 22명 등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탑과 묘가 있다.

용성지(권이지, 읍성)’에는 장차 왜적들이 향교산(鄕校山(과 기린산으로 올라가거나 덕음봉과 빙수봉(氷水峰)으로 올라가 군막을 치고 결전을 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유재란 때 남원읍성이 왜적에게 함락되기 전 남원부를 둘러싸고 있는 빙수봉을 비롯, 향교산과 덕음봉 등에서 벌어졌던 긴박했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남원 요천(蓼川)'자는 한자 여뀌요로 여뀌꽃이 만발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얼마나 이 꽃이 만발했으면 이같은 이름까지 얻었을까. 요천은 광한루앞 등 시내를 가로질러 섬진강에 합류하는 샛강이다.

요천변 남원 빙고에는 특별한 사연이 전해온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들의 악랄한 만행에 관해 요천 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노스님이 혼잣말하며 사람들 곁을 지나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사람이 노스님에게 달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자, 스님은 요천변 바위에 굴을 파고 겨울철 꽁꽁 언 요천의 얼음과 남쪽 지방에서 나는 백급이라는 약초를 구해다 가루를 내어 굴속에 넣어두면, 내년 여름에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고 일러 주었다.

스님의 말에 따라 요천 변 산기슭에 동굴을 파서 겨울철 요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가져다 동굴에 채우고 백급가루를 함께 넣어 두었다. 이듬해 8, 정유재란(1597) 때 왜적들이 쳐들어와 남원성이 함락되며 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약이 없어 애가 타던 때에 동굴에 넣어둔 얼음과 백급가루로 피 흘리는 부상자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이다. 동굴에 얼음을 보관하였던 일대를 빙고치라 불렀으며 지금도 요천 인근 산책로에는 빙고로 쓰였던 동굴 입구를 살펴볼 수 있다.

1500년대 말에 제작된 남원 고지도에는 광한루 맞은편에 있는 요천변 승월대 옆에 얼음 창고인 빙고가 표기되어 있다. 남원에는 세 곳에 빙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송동면 흑송리 요천변과 대산면 운교리 팽빙고, 그리고 승월대 아래 요천빙고가 바로 그것이다. 남원부에서는 겨울이면 청정요천의 맑은 얼음을 떠다 승월대 아래 빙고개의 빙고와 용투산 아래에 있던 빙고에 저장하였고 민간인들의 빙고로는 대산면 금강골 고개 마루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해인가부터 요천 변 빙고는 관리되지 못하고 폐허가 되어 남원 고지도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게 됐다.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은 승월대 아래 빙고치에는 지금도 큰 침니가 있어 빙고를 만들어 재현한다면 요천과 어울리는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고 했다.

남원 백성들은 그 이후로 은어의 진상품 품격과 고급화를 위해 요천변에 얼음 창고 빙고(氷庫)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는 은어 진상품에 사용했다 구전에 의하면 남원출신 황희 정승은 새벽에 일어나 섬진강에서 올라온 요천 은어를 잡아 축지법으로 순식간에 임금님 아침 밥상에 올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 속에 든 속살은 지방 고을 백성들의 여론이 실시간으로 임금님 귀에 들고 있으니 고을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지방관리들에 대한 진상품을 활용한 사회적 경고였던 것이다. 남원 섬진강 요천 은어가 임금님의 진상품일때 섬진강 소금길로 올라온 소금은 은어의 소금구이를 내고 남원 고을 손님접대 음식이 됐다. 섬진강 소금길 남원구간 요천 은어는 임금과 백성의 여론 소통채널이었다는 김용근 선생의 연구 결과다.

1984년 남원문화원에서 빙고유적의 지표조사를 실시한바 늦은 봄까지 얼음발(0°c)이 있는 빙고 터를 찾을 수 있었다. 한겨울 맑은 얼음을 뜨던 요천 모습은 어떠한가?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원 승련사  (0) 2020.06.28
전북고속 1920년 창업  (0) 2020.06.21
남원 요천  (0) 2020.06.18
전주 빙고리(氷庫里)  (0) 2020.06.17
전주 팔과정(八科亭)  (0)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