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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임실 신안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 ‘신안구가(新安舊家)’는 '신'의 왼쪽 아래가 木(나무목) 대신 未(아닐미)로 쓰여 있어 아직은 아니라는 의미다. ‘안’은 여자가 집을 발로 차는 모양새다. ‘구’의 아래에 있는 臼(절구 구)는 아래가 깨져 있다. 대비 권력에 치여 깨어진 집안과 같은 형상이니 새로운 것은 아직 멀었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가능하리라.

조선 연구자들이 아쉬워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다. 세도정치에 저항해서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3~4년 정도 하다가 왕으로 즉위도 못한 채 죽었다. 이 효명세자의 스승이 추사 김정희다. 추사체라는 걸출한 필법을 남긴 인물로 꼽히지만 그의 정치적 생애가 상처투성인 이유다. 널리 알려진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은 효명세자 죽음 뒤 밀어닥친 보복이다. 추사가 남긴 글씨를 가만히 보면 못다한 정치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안동 김씨 등 세도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글씨로 교묘히 가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게 바로 ‘추사코드’다.

임실 유림들의 이상향은 신안땅이다. 임실 신안서원(新安書院,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22호)은 조선조 유림의 교육을 담당하던 서원으로 송나라 주희와 성리학자인 한호겸 등을 배향한 곳이다.

임실읍 신안리는 임실읍에서 쉰재(五十峙)를 넘어 현곡리로 가는 길에서 신안리로 갈 수 있고, 또는 임실읍에서 청웅면으로 가는 모래재의 신안삼거리에서 신안리로 갈 수 있다. 신안리의 서북쪽으로는 백이산이 높이 솟아올라 청웅면, 운암면, 임실읍의 세 개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두만산에서 뻗어나온 용요산이 길게 남쪽을 두르고 있으며, 용요산과 운수봉에서 산줄기가 현곡리 뒷쪽을 흘러가면서 현곡리, 신안리, 장재리가 하나의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신안(新安)은 말 그대로 자의 본관지를 뜻하고 있다. 장재리는 송나라 유학자 횡거 장재 선생을, 낙촌과 정촌은 낙양에 살던 송나라 유학자 정호, 정이 형제를 뜻하는 것으로 정자동이라고 불렀으며, 신안리 앞을 흐르는 물은 낙천, 백이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은 구곡천(또는 신안천)이라고 불렀으니, 신안리, 장재리, 현곡리는 유학자들의 이상향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1819~1820년 사이에 순창의 무이서원(武夷書院)의 예에 따라 주자의 영정을 봉안키로 해 함평 자양서원에서 모사해 와서 봉안했고, 신안사를 신안서원으로 고쳤다. ‘신안구가(新安舊家)’는 흔히 주희(주자) 가문의 고향인 신안의 오래된 집이니 주자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집 정도로 해석한다. 그러나 “세도가에 지금 도전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라고 읽어낼 수도 있다. 임실에 더 큰 인물의 탄생을 기대해본다./이종근, 삽화 정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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