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공감 528호] 수필 척독(尺牘)과 SNS
이종근
짦은 편지가 생각나는 가을이다. 전북 고창의 유영선(柳永善. 1893∼1961)가에서 받은 한말 유학자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의 간찰 즉 편지가 보인다. 권순명은 한말 유학자로, 경술국치후 스승 간재 전우를 따라 서해의 군산도·왕등도·계화도 등지에서 15년 동안 학문에 몰두해 화도주석(華島柱石 : 중심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었다. 그 뒤 스승의 문집·예설(禮說)·척독(尺牘) 등을 편집, 출간했다. 그는 1937년 47세 때 척독을 편집하기 위해 전국 팔도에 통문을 발송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 삭발을 강요당하자, 장도를 가지고 스스로 목을 찔러 피가 낭자하였으므로, 왜경들이 감복, 풀어주었다.
‘짧은 글’이라고 해서 간독(簡牘), 척독(尺牘), 간찰(簡札)이라고 불렀던 옛사람들의 편지글. 짧다 보니 말장난이나 기교를 부릴 틈이 없다. 용건이나 마음만 전하면 그뿐이다. 손바닥 만한 토막글이 뭐 그리 대수일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1948년부터 1953년 사이에 쓰인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의 친필 서한문을 소장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한암(漢巖, 1876~1951)스님과 탄허(呑虛, 1913 ~1983)스님이 조창환선생(전 강릉 사천초등학교장)에게 보낸 것으로, 유족들이 월정사에 기증한 것이다. 편지는 한암스님 4통, 탄허스님 1통이다. 탄허스님 서찰은 1953년 2월에 발송한 것이다. 탄허는 승려이자 유불도(儒佛道)에 능통한 20세기 대석학이다. 그는 1913년 독립운동가 김홍규(金洪奎)의 아들로 김제에서 출생해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화엄경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고 승가교육에 힘쓰다가 1983년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열반에 들었다.
'지난해 가을 여러 선생님들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지금까지도 그 향기가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뜻밖에도 적막한 가운데 편지가 와서 펴 보니, 받은 은혜에 무어라 사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받은 이후 초봄 추위가 여전히 매섭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육영(育英) 중에 편안하신지요...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성대한 마음으로 타인들과 좋은 교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붓이 다 닳도록 써도 종이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이만 쓰고 갖추지 못합니다' 조씨에게 보낸 답장 서신이다. 편지에는 이전의 만남을 그리워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상세히 묻는 자상함이 드러나 있다.
탄허스님은 편지 형식 대신 합죽선 선면에 진리를 담은 싯구를 써 전달했으니 '지풍(知風)'이다. 이는 1980년대 초 작품으로 이전홍에게 주었다. '지풍지자(知風之自, 바람이 일어나는 곳을 알고) 지미지현(知微之顯, 은미함 속에 드러남을 안다면) 가여입덕의(可與入德矣, 함께 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위이전홍선생 탄허(爲李全洪先生 呑虛)' 이는 '중용' 33장의 내용으로, 원인을 알고 미세함 속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을 안다면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깊어만 가는 가을에 정말로 어울리는 이들 편지를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장에서 만났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진솔한 마음을 담은 한 줄 한 줄을 참글로 보았다. 문집을 내면서 간찰을 빠뜨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짧은 편지라고 해서 안부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삶의 철학이나 시국관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한 장의 간찰에는 선인들의 진솔한 마음뿐 아니라 서정과 여유, 기개와 절조 등이 담겨 있다. 조선은 문장 하나에도 도(道)를 담아야 했을 정도로 감정 표현에 엄격한 사회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록물이었던 편지는 우리가 ‘고고하다’고만 생각했던 선비의 다양한 감정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척독’은 오늘날의 ‘SNS’ 와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다. 길지 않은 문장에 생각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형식이 SNS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따라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생각난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로 시작하는 이 곡은 후렴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로 끝맺음한다. 과거 선비들과의 현대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의 장 마련을 기대하면서 SNS가 진정과 소통을 담기 바란다. 편지 한 통이 그리운 이 가을날, 비바람을 대지에 흠뻑 뿌려주고 있다. 척독같은 편지를 보내줄 사람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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