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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오원역과 오원교

이순신장군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서울 의금부 옥문을 나와 4월 21일 여산에 도착, 22일 전주, 23일 임실, 24일 남원, 25일 운봉을 거쳐 구례로 경로를 바꾸게 된다. ‘전주에서 일찍 떠나 오원역(烏原驛·임실 관천면 선천리)에 닿아 역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아침을 먹었다. 얼마 후 도사(都事)가 왔다. 날이 저물녘 임실현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난중일기 본문 중에서 백의종군대로 중(임실구간)’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슬치를 넘어 관촌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곳은 오원역이 있던 곳으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잠시 쉬었을 것이다. 관촌장은 조선시대때 생겼다. 삼례도찰방에 딸린 오원역(烏院驛, 오원은 관촌의 옛지명)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관촌(館村)은 객지에서 묵는 숙소라는 뜻인 객관(客館)의 뒷 글자에서 유래가 됐다. 그래서 이곳을 오원 또는 오원역이라고 했다고 했다. 원(院)이나 역(驛)은 상당히 큰 규모의 국립 여행자 숙소를 뜻한다. 오원교(烏院橋)는 오원천의 중심지인 관촌면 관촌리와 덕천리를 연결했다. '운수지(雲水誌)’엔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고 했다. 또 ‘오원역은 삼례역에 속하며 말 10마리, 역리 7인, 종 68명, 계집종 37명이 있었다’고 했다. 남원, 전주, 그리고 통영별로로 나아가는 목교(木橋)가 있었으리라.
1950년 9월 27일 관촌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 명이 관촌면 관촌리 오원철교 및 포탄구덩이에서 집단희생됐다. 얼마전 까지 다리 측면에 '午十二月竣功'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는 표석이 있었다. 이는 경오(庚午) 12월이니 1930년 12월이다. 또, '소화오년경(昭和五年庚)'의 명패가 있었던 바, 1930년이 확실하다. 이를 서로 짜맞추면 아마도 '소화오년경오십이월준공(昭和五年庚午十二月竣功)'이다.
하지만 전주-남원간이 4차선으로 뚫리면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다가 근래에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전쟁때는 일부 다리가 끊겼으며, 난리중에 가교(假橋)를 놓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강제 동원되기도 했다. 비록 오원교는 사라졌을지라도 이순신 프로그램을 만드는 콘텐츠 등으로 활용될 수 없나. 이순신과 오원역 스토리를 찾아 백의종군 행사 등을 가져봄직하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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