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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임실, 추사김정희 금석문의 메카


                                                                                         최성간묘비

                                                                                       이종근이 찾은 귀로재

                                                                                            양세정효각

                                                        김복규.김기종효자정려비 및 정판

                                                                  효덕연경지각

                                                                                           최성간 묘비

                                                                                                     최성간 묘비


                                                                                          최성간 묘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임실에서 발견됐다. 전라금석문연구회와 임실문화원은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에 있는 전주최씨 만육파 후손 최성간(17771850) 묘비를 분석, 앞쪽 글씨를 추사가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최성간 묘비 글은 조카인 최한중이 185110월에 지었다. 그런데 김정희는 18517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기 때문에 이듬해 10월 해배 이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묘비 뒤쪽 글씨는 추사 외가인 기계유씨 가문 유화주(17971860) 작품이다. 비석을 세운 장소는 '임실(任實) 하신덕면(下新德面) 율치(栗峙)'로 기록됐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은 "임실군 김철배 학예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묘소는 사륜차로도 들어갈 수 없는 오지에 있으며, 금석문이 학계에 보고된 적은 없다"고 했다. 추사 연구자인 박철상 박사도 "사람 인()자는 추사가 말년에 종종 사용한 형태의 글씨인데, 비문에서는 처음 발견됐다""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김정희가 말년에 남긴 묘비 금석문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임실에 묵향(墨香)의 세월이 오롯이 깃들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임실지역은 이 최성간의 비석을 포함, 비석 3개와 편액 3개가 있어 명실상부한 추사금석문의 메카다.

비석으론 최성간묘비와 함께 정월리 김복규 정려비, 김기종 정려비가, 편액으론 양세정효작, 효덕연경지각, 귀로재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김복규.김기종효자정려비 및 정판(金福奎.金箕鍾孝子旌閭碑 旌板)1993831일 전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됐다.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비이다.

임실 효충서원 내의 정려각안에 서 있는 이 2기의 비는 조선 철종 때 사람인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한 이로,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아버지께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됐다. 바로 이같은 그의 효행을 듣고 나라에서는 증 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기종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 했다.

그때의 울음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2기 모두 형식이다. 앞면에는 각각 비의 제목을 세로로 새긴 바,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조선 철종 6(1885)에 세운 것으로, 이조참판 서유훈이 왕의 명을 받들어 건립했다. 1981년 전주도시계획에 의거, 김해김씨 문중의 총무 김재두(작고)씨가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임실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는 김홍선(후손이자 서예가)씨의 설명이다.

김복규·김기종 효자정려비 및 정판과 비각에는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친다)’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비각 왼쪽에는 朝鮮孝子贈參判金公福奎旌閭碑(조선효자증참판김공복규정려비), 오른쪽에는 朝鮮孝子贈敎官金公箕鍾旌閭碑(조선효자증교관김공기종정려비)가 나란히 서있다. 내부 가운데에는 兩世旌孝閣(양세정효각, 2대에 걸친 효자각)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과 비석의 글씨는 모두 추사 김정희가 썼다.

추사의 전형적인 예서체의 전범을 뚜렷이 보이는 김정희의 귀로재(歸老齋)’ 편액은 ()’자와 ()’자는 크게 포치를 하고, ‘()’자는 글씨를 바짝 조이면서도 내려 길게 맞춰 조형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명작 중의 명작란 평가다. ‘귀로재는 추사의 험경(險勁)한 개성적 필치가 잘 나타난 고예풍의 글씨가 고졸해 보인다.

임실 상월리 김기종 제각의 귀로재편액은 1855년 김기종의 아들 김영곤이 양세효자비문을 받으면서 함께 받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귀로재의 상량문을 보면 건립 연대가 1859년 기미(己未), 추사가 타계한 후 3년 되는 해로, 아마도 추사 말년인 1855년 김기종의 아들 영곤(永坤) 양세효자비(兩世孝子碑)를 써줄 때, 이 편액도 동시에 해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효자 김기종은 아버지 복규(福奎)와 함께 임실 정월리에 모셔진 양세효자비의 주인공으로 추사가 이를 직접 찬서했으며, 이 재실엔 전북출신 창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쓴 구암(龜巖)’ 편액과 상량문이 함께 전해오고 있기도 하다.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은 최성간 비석을 찾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5년 전부터 고 전손주항의원 제보로 온 산을 뒤졌는데, 이제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만큼 지역 향토문화재나 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임실군에 모두 6점의 추사 김정희 글씨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다른 지역과 연계한 추사 금석문 탐방길을 만드는데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새전북신문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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