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옛날 미원탑 사거리를 알고 있는가. 팔달로 기업은행 입구 앞 ‘전라북도 도로 원표’ 표지석이 세워진 곳을 서성거리고 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는 도로의 기점,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한 것으로 도로법 제2조 제1항 4호에 도로의 부속물로 정해져 있으며, 쉽게 말해 이를 기점으로 전국 시·군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은행 정문 입구 화단에 선 장방형 원표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지상고) 1m40㎝, 가로 세로 25㎝×25㎝ 크기다. '1964년 10월 10일 전주라이온스크럽 건립'이라고 정면에 새겨져 있다. 워낙 글씨를 깊이 파고 바탕이 좋은 화강암인지라 마치 새 것 같다. "보통 비석 글씨는 음각이 얕고 'V'자 형태로 가파르게 파지만 이 글씨는 몽글몽글한 'U'자형으로 깊이 새겼지. 돌도 최상의 황등석으로 주문했어."
화강석 원표 건립을 제안한 유승국(의사·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씨의 회고를 들었다는 전 언론인 임용진씨의 설명이다. 이 원표는 원래의 길이 6척(1m80㎝)짜리 돌로, 40㎝는 땅에 묻혔다.
‘전라북도 도로 원표’ 의정갈한 예서체 글씨는 고재봉(高在烽, 1913∼1966)이 썼다. 그의 본관은 제주로, 호는 석당(石堂)이며 옥구출신으로 익산서 활동한 현대서예가 중의 대가이다. 그는 소전 손재형선생의 제자로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으며, 이리시 문화장 1호 수상자이다.
정읍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기념시설물로 1963년 건립됐다. ‘동학난’이라 불리던 시절, 처음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획기적 계기가 됨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인식 변화의 전환점이 됐다. 1894년 평등사상에 기반한 반봉건과 반침략의 기치를 듣고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제국주의와 정부의 공격을 받아 좌절된 까닭에, 기념탑이 건립되던 1963년까지도 혁명이 아닌 ‘동학란’이라 불려졌다.또 참여자들은 반란군이나 역적으로 몰려 지독한 탄압을 받아 국가와 사회로부터 격리됐으며, 유족이나 후손들 또한 숨어 살아야 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함구하던 시절이었다. 이 탑 역시 그가 1963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안 고려자기 도예지(1963), 군산 옥구군 충현탑(1963), 고창 신오위장비문(1963), 익산역 4.19 학생의거 기념탑(1963), 전주종합경기장 수당문 휘호(1963) 등도 그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1966년 5월에 인후암 판정을 받은 후 다음달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서예사에서 그의 이름이 점차 잊혀져 가고 있어 아쉽기만 하다. 1938년 북창동(현 창인동1가)으로 이사를 한 후 운영한 광고회사 청조사(靑鳥社)의 흔적은 지금 어디에 있나./이종근(삽화 새전북신문 정윤성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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