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면 농산(農山)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 전 고려 말엽에 형성된 마을입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농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던 바, 매년 풍년이 들어 해마다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게 되자 그때부터 정착해 농산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산마을은 본래 용담군 일남면 농산리였다가 1914년 3월부터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농산마을로 되었다가 지금은 용담호에 수몰된 곳입니다. 교동 노루목재 넘어 무거마을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쪽바우들에 살던 양지편마을 또는 양악리, 장평리 마을에 살던 나주임씨들이 너른들에 농막을 치고 모여들어 광활한 농지가 많은 곳이라해서 농산마을이라 이름하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주민의 60% 이상은 나주임씨(羅州林氏)가 점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이는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임타(林㙐)를 입향조로 하는 진안군 일대에 살고 있는 세거 성씨입니다. 진안에는 이조 임비의 16세손 절도공 임진의 아들인 백호 임제의 후손들과 16세손 정자공 임복의 손자 몽촌 임타(林㙐)의 후손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임제의 현손 첨중추부사 임도(林燾)는 현종 대인 1835년에 나주에서 정천면 농산리로 이주합니다. 임타의 후손 중에 진안으로 이거한 사람은 임타의 아들로, 4남 임중유, 5남 임달유, 6남 임홍유, 7남 임만유 등입니다.
나주임씨는 진안군 상전면 언건리, 성수면 염북리, 정천면 농산리, 진안읍 반월리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습니다.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에 나주임씨 정자공파 상주공계 용담 문중 세천비가 있고, 재실인 영모각이, 또, 봉학리에도 조림각이 있었습니다.
‘농산 마을의 뒷산은 감룡이다. 들판에 높은 터전이 되어 건해술방에서 물이 뒤로 감돌아 적시며 나가고 좌선룡에 사총파이다. 지건지방은 음지로써 이곳에 집을 지을 경우, 주인의 행실이 어지럽고 자손의 성정이 거칠어 불화가 잦다. 만약 관방에서 득수가 되는 집터는 재산을 얻을 수 있다. 지건지방은 군요회방형으로 산은 솟고 물은 아름답게 모여들었으니 어진 사위를 볼 형국이며, 마을 뒤로 물이 길게 흘렀으니 혹 부녀의 행실이 문제되기도 한다. 청룡은 층층으로 높았으니 큰아들이 세력을 얻는 터이다. 마을 앞 도로에 십자로가 있기에 노름벽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백호는 없고 청룡은 있으니 집을 떠난 사람은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문곡으로 되어 있는 모양의 길이 있으니 상업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나오며 건방산이 높고 정방사수가 서로 공손하니 인구가 번성하고 곤봉이 높아 내주장이 강한 형국이다.결록(訣錄)’
1997년 농산마을 한 빈집 앞에 아래와 같은 경고문이 붙어있습니다.
‘※경고문
‘주인 허락없이 출입금지.
※고물 장수 출입금지
출입자 법의하여 하겼읍애다 주인 백’
당시엔 고물장수들이 사람이 없는 집을 들락거리며 출입을 자주 했나 봅니다. 오랜 터전을 놓고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고통이 따로 있을까요.
"빈병이나 고물 사려!" 농산마을에는 인기척조차 거의 없었고, 인기척이라고 해봤자 이사간 집에 들어가 창문 새시와 쇠, 가전제품 등을 트럭에 싣는 고물장수들 밖에 없었습니다.
빈집 앞 마당에 도착해서 집주변을 둘러보니 내 키보다 더 큰 풀들 하며, 집 담벼락을 휘감은 넝쿨장미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임을 알려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집앞의 조그만 텃밭에 가지런히 심어있는 토란과 옥수수, 땅콩 등 농작물들은 최근에 누군가의 손길을 받은 듯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고향집을 떠나면서 매우 아깝게 생각했던 도라지는 보라색, 하얀색 등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며 자라고 있습니다. 집주변을 살펴본 뒤 집안을 둘러보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건물은 가족들이 고향집을 떠난 뒤에 곧바로 고물상에 넘겨져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최근 자재값의 인상으로 고가에 거래되는 창문에 설치되어 있던 새시는 당연히 온데간데 없고 철문이었던 대문 하며, 문고리는 물론 심지어는 개집에 묶여있던 쇠로 된 개목걸이까지, 쇠로 된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쓸어가 버려 집안에 남은 거라고는 나무로 된 장롱과 책상, 유리만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농산마을을 찾아오는 고물장수는 마을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중심 공터(마당)에서 연신 가위질을 하며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손에 빈병이나 고물들을 들고 나오곤 했습니다.
동생과 나도 온갖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리어카 위에 가져온 부대자루에 담긴 빈병 개수를 세고 고물가지 수를 세어 놓습니다. 고물장수 맘씨가 고울 것이라고 최면을 걸면서 셈한 것을 엿으로 바꿔내곤 했습니다. 정말 맘씨가 좋아 후하게 엿을 얻어내면 동생과 난, 개선장군처럼 득의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때는 고물장수도 리어카도 참 많았습니다. 리어카와 소달구지 대신에 경운기가 들어오고, 아스팔트 도로가 나고,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디론가 숨어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농산마을에 가끔씩 고물을 모으러 고물장수가 다녀가곤 했습니다. 고물장수는 고물을 받고 그 값으로 엿을 주어 ‘엿장수’라고 불렀습니다. 빈 병, 솥단지, 냄비 뚜껑 등 쓰지 않는 물건을 잔뜩 가져다주어도 엿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 엿장수를 골탕 먹이려고, 사람이 없는 집의 물건을 가져가는 그들을 꼼짝 할 수 없도록 특공대라도 조직해야 할 듯 했습니다.
갈용리 농산 유적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생활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진안에서 최초로 송국리형 집자리가 조사된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라는 점과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송국리형 문화가 금강 최상류 지역까지 파급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용담호에 수몰되어 볼 수 없으며, 수몰되기 전에는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농산 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경고문도 이제는 수몰돼 흔적도 없이 사려져 이제는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사진 1장과 함께 소중한 추억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이종근, 사진=이철수 용담호사진문화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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