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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용담

<12>용담면 월계리 이사가는 할머니

   

 

 

 

1998년 용담면 월계리 한 할머니가 저 멀리 나전칠기 농이 보이는데 오른손으로 문풍지를 떼고 있습니다. 이 농은 화려한 나전칠기나 깊은 멋이 나는 검은빛 옻칠기는 가격이나 디자인 면에서 일상용품으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마도 시집을 올 때 사온 것이 분명할 터입니다.

바로 이 농의 주인인 할머니가 이삿짐을 모두 챙기고 떠나기 전, 살던 집의 문풍지를 마구 찢고 있습니다. 나쁜 기운이 따라오지 마라는 의미인 셈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인가요.

훗날, 가슴을 뜯는 가야금소리 달빛실은 가야금소리 한 줄을 퉁기면 옛집이 생각날까요. 하지만 김용님의 가사처럼 또 한 줄을 퉁기면 술맛이 절로난다 퉁기당기 둥기당기당하지 않은 고단한 내 삶이여!

월계리(月溪里)는 마을을 주자천이 반달처럼 에워싸 흐르므로 달계 또는 달기라고도 불렀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달계역의 존재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달계라는 이름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달계을 월()로 보고 월계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전승으로는 벌판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닭이 우는 새벽부터 일을 하여 달기 동네라고 부르던 것이 달계, 월계로 변했다고 합니다.

조선 말 용담군 군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정리(三亭里)를 병합해 월계리라 이름하고 진안군 용담면에 편입됐습니다. 용담댐 건설로 전 마을이 수몰되었으나 산기슭에 수몰 주민들이 이주하여 새로 월계 마을을 조성, 이주했습니다.

북서쪽 남산을 경계로 수천리와 접경하고, 북쪽 장고개·삼남재·왕두골을 경계로 하여 송풍리와 접경하고, 동쪽은 안천면 삼락리, 남쪽은 정천면 망화리, 남서쪽은 정천면 모정리, 서쪽은 호계리와 접경하고 있으나 용담댐 담수로 경계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용담댐 수몰로 전 마을이 수몰되었으나 서북쪽 남산 기슭에 신월계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습니다. 현재 리의 면적 대부분이 물에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이곳엔 1667년에 용담 현령 홍석이 창건한 삼천사(三川祠)가 있습니다. 1668년 숙종으로부터 삼천서원(三川書院)이라는 편액을 받으면서 번창했지만 서원이 철폐된 후 주춧돌만 남게 됐습니다. 1732년 삼천서원 묘정비를 경내에 세웠으나 서원이 철폐되자 명두산 중턱에 옮겨 세웠습니다. 1943년 큰 수해가 나고 산사태로 인해 비석이 떠 내려와 길 옆에 방치되었던 것을 주민들과 용담 향교 유림들이 협력해 지금의 용담면 황산리에 있는 태고정 앞에 옮겨 세웠습니다.

, 성남 마을에는 성남리 산성이 있습니다. 금강 본류가 S자로 감아 도는 지역의 낮은 능선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며, 구조와 형식은 백제 지역 산성에서 보이는 양상과 유사합니다.

황산 마을 동쪽 구릉 정상에는 고분 떼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 지구에서 12기의 고분, 나 지구에서는 5기의 고분이 용담댐 수몰 자료 조사 과정에서 확인됐습니다. 이 고분은 가야계의 구덩식 돌널무덤이며 봉토 안에 하나의 고분만 배치되는 단곽식이 주류입니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철기가 주종을 이루며, 백제계와 가야계 토기들이 거의 절반씩 부장되어 있는 반면 나 지구에서는 가야계인 고령 양식의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시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옛날에는 도보, , 교자(轎子)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했습니다. 때문에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마필(馬匹)과 역정(役丁)을 갖춘 역()을 두어 공무여행자에게는 소정의 편의를 제공하였고 진상관물의 수송을 담당하였는데 고려 때에는 520, 조선시대에는 540개가 있었습니다.

진안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전주-진안-장수로 연결되는 단령역과 금산-용담-진안으로 연결하는 달계역, 두 곳으로 모두 금산 제원 도찰방 속역이었습니다. 단령역은 진안읍 단양리에 있었고 달계역은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습니다.

이도복의 마이산기(馬耳山記)’이내 동문을 나서면 영계서원(靈溪書院)의 유지가 있는데 사림들이 일찍이 만육당 최충익공(崔忠翼公)과 이충경공(李忠景公) 상형(尙馨), 쌍첨(雙尖) 이인현공(李仁賢公), 규암(葵菴) 전계종공(全繼宗公) 등 여러 현자들을 모신 곳이다. 조금 서쪽으로 푸른 절벽 아래에는 신백담(申伯湛)이 만력(萬曆) 년간에 여러 명사들과 함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를 삼계 석문(三溪石門)’이라 하는 바, 월계(月溪)와 쌍계(雙溪)의 물이 이곳에서 합쳐져서 하나의 시내를 이루게 된다. 쌍계 석문은 그 동쪽 3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유묵(遺墨)을 탁본해 새긴 것이다고 기록됐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겨울에 쌓인 눈을 아침 일찍 일어나 치우고 동네 고샅도 깨복쟁이 친구들과 싸리비로 길 내곤 했습니다. 또 산에 올라 산토끼 몰이에 동네 앞 논에서 썰매 타던 기억, 사랑방에서 가마니 짜고 인삼밭 지붕용으로 쓰는 발을 만들던 추억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할아버지가 궐연마는 것을 보고 집 뒤 묘지에서 친구들과 마른 배춧잎을 종이에 싸서 피우다 묘를 홀딱 불태워 먹었습니다. 동네 어른이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엄마한테 죽도록 맞는 기억이 아련합니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내게 훗날 용담호 주변을 둘러보는 길은 언제나 탑돌이와 같다는 생각이 듦은 왜 일까요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의 금강 상류에 있는 다목적댐이 바로 용담댐입니다. 이로 인해 진안군의 6개 읍면 68개 마을이 수몰되어 2,864세대에 12,616명의 이주민이 발생했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물망(勿忘), 비망(備忘)의 기록들. 난 거기 새겨진 글 혹은 명단을 찬찬히 더듬을 때마다 진진한 떨림을 느끼곤 합니다.

다 허물어져내린 집 앞에서 막소주를 들이켜는 할머니의 슬픈 표정, 이삿짐을 쌓아놓고 이웃들과 눈물의 인사를 하는 사람들 등 수몰민들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습니다.

퇴계 이황은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비어 있는 방 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하고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 훗날 상사별곡(相思別曲)에서 두향에 대한 그리움을 매화를 통해 남깁니다. 겨울의 추운 한기를 뚫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매화는, 그래서 어려운 현실 속에서 꽃을 피우는 사랑의 꽃일지도 모릅니다. 나전칠기 농에 그려진 매화가 생각나는 나릇한 봄날,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종근, 사진=이철수 용담호사진문화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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