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종이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7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종이는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와 달리 긴 섬유를 두드려(고해, 叩解)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고려 후기 전주 또한 종이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사절요> 1280년(충렬왕 6년) 3월 기록에 보면, 감찰사(監察司)에서 왕에게 각도의 안렴사(按廉使)와 별감(別監)이 공물과 부세를 빙자해 민간에게 명주(紬), 모시(苧), 종이(紙), 등의 물품을 거두어 권문세가에게 뇌물로 바치고 있으니, 모두 죄를 주라는 상소를 하였다.
그런데 이때 왕이 승지인 정가신에게 “닥나무는 땅에서 나는 것인데, 무엇이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는가” 물어보았다. 이에 정가신이 “신이 일찍이 전주에서 일을 맡아 볼 때 백성들이 종이 만드는데 고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제 중앙에 발탁돼 이 자리에 있어본 즉 종이 쓰는 것이 또한 많사오니, 자연 부끄러운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니, 왕이 종이 공납만은 면제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주의 종이를 ‘상품(上品)’이라고 기록, 조선 제일의 종이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주는 조선시대 내내 한지가 최고로 발달한 도시가 됐다.
김시습의 ‘전주 종이 금강전(錦江箋 卽全州紙)’이란 작품은 ‘금강 봄 물 매끄러운 종이에, 한가로이 새 시를 지어 두어 편 쓴다.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천둥 치고 비 내리는 듯, 흰구름 쌓인 속에 그린 용이 꿈틀거리는 듯’이라고 소개된다.
전주에서 만드는 한지가 마치 봄물이 풀린 금강의 물고기처럼 윤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지(錦江紙)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주한지 위에 쓴 글씨가 마치 용이 꿈틀대며 날아가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금강전은 전주에서 생산되는 한지(韓紙)를 일컫는 말이다. 백면지(白綿紙)는 한때 과거시험지로 사용되었던 희고 견고한 종이이다.
<광재물보>에 백추지는 “백면지이며 고려에서 난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백추지와 백면지가 동일하거나 비슷한 품질의 종이임을 알 수 있다.
백면지의 생산지는 전라도 등지와 충청도 충주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면지가 전라도 백성들의 요역으로 무겁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권포선생시집’의 ‘宋李復古參議尹全州名彦適(전주부윤으로 가는 참의 이복고를 보내며)’는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시로, '평생토록 완산지 몹씨 사랑했는데(平生酷愛完山紙) 부드럽고 매끄럽기가 관기의 피부보다도 더 낫네. 어찌하면 그대를 쫓아 수부(水部, 공조의 별칭)라도 되어 매화 핀 동각(東閣)에서 붓을 희롱해볼까’라고 했다.
이는 어득강이 전주부윤으로 부임할 때 이언적을 송별하면서 지은 시로 의미를 더한다. 고려시대 선유도를 찾은 바 있는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귀국 보고서에 고려청자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써 중국에 알렸다. 서긍은 고려 나전칠기를 보고는 “기법이 매우 정교해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썼다.
일찍이 소동파는 고려청자와 함께 고려의 종이를 천하 명품 열 개에 넣었다. 중국인들은 고려 종이를 '황금과 같이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종이'라는 뜻으로 금령지(金齡紙)라 불렀다.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 비단은 오백년을 가지만 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뜻이다.
이에 전주 금강지와 백면지, 완산지를 연구하고 살릴 방안을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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