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와 금석문은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와 돌, 그리고 쇠붙이에 글을 새켜 놓은 것을 말한다.
비문은 대개 산문으로 된 서(序)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구성되며,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비문을 대개 ‘비문병서(碑文幷序)’라고 한다.
대개 선정비 등은 운문으로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한 것이 많으며, 효자, 효부,열녀의 정려비는 사적과 찬송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금구현은 문향의 고장으로 수 많은 비를 세워 선조 혹은 효자, 인물들을 드러내고 칭송하여 왔다.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500m쯤 되는 금구향교의 만화루(萬化樓는 孔子之道 萬物化生, 공자지도 만물화생에서 따옴) 앞쪽 진입로 양쪽 50m 되는 길가에는 39개(오른쪽 22개, 왼쪽 17개)의 비석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으면서 오랜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
이 비들은 옛날의 금구현 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것으로서, 그 보존을 위해 이곳에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이 가운데 ‘학교중건비명(鶴橋重建碑銘)’를 제외한 나머지 38개는 모두 칭송비이다. 다른 향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비석들은 이 지역 고을을 다스렸던 관찰사, 목사 군수, 현감에 대한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인 칭송비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지만 표현 방식은 모두 제각각이다.
이서구(李書九), 서기순(徐箕淳), 서상정(徐霜鼎), 이호전(李鎬悛), 조한국(趙漢國), 이돈상(李敦相) 등 전라관찰사 6명의 영세불망비, 또는 선정비가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관찰사서공상정영세불망비(觀察使徐公霜鼎永世不忘碑 同治 九年(1870년)’는 이곳의 유일한 철비이기도 하다.
오른쪽의 비석군으로, 觀察使李公書九永世不忘碑(관찰사이공서구영세불망비, 壬午閏 3월), 縣令鄭侯久容淸德善政碑(현령정후구용청덕선정비, 壬午閏 3월), 縣令趙侯文命淸德善政碑(현령조후문명청덕선정비, 비갓 있음), 縣令洪侯在兢淸德善政碑(현령홍후재긍청덕선정비, 壬子 정월), 縣令金侯浣淸德愛民善政碑(현령김후완청덕애민선정비, 庚寅 4월, 비갓 있음), 御史沈公相學永世不忘碑(어사심공상학영세불망비, 乙酉 4월, 비갓 있음), 縣令趙侯鎭大恤民去思善政碑(현령조후진대휼민거사선정비), 郡守李候鉉昇布德碑(군수이후현승포덕비, 庚卯 7월 邑 七里 겁립), 縣令朴侯宣陽淸德善政碑(현령박후선양청덕선정비, 乙亥 12월, 비갓 있음), 縣令鄭候基秀恤軍善政碑(현령정후기수휼군선정비, 壬子 3월), 轉運御吏趙公弼永恤民善政碑(전운어리조공필영휼민선정비), 觀察使徐公箕淳淸白永世不忘碑(관찰사서공기순청백영세불망비, 丁未 9월), 縣令李侯源長淸德去思碑(현령이후원장청덕거사비, 丁未 9월), 縣令金侯錫喜永世不忘碑(현령김후석희영세불망비), 鶴橋重建碑銘(학교중건비명, 순조 33년, 1833년), 觀察使徐公霜鼎永世不忘碑(관찰사서공상정영세불망비, 同治 九年(1870년) 철비), 觀察使李公鎬悛永世不忘碑(관찰사이공호준영세불망비, 癸酉 8월, 비갓 있음), 縣令李候時敏永世不忘碑(현령이후시민영세불망비, 壬子 정월), 縣令趙侯在淳善政碑(현령조후재순선정비, 癸酉 8월, 비갓 있음), 縣令尹侯成求淸德善政碑(현령윤후성구청덕선정비), 縣令鄭侯匡淵恤民善政脚(현령정후광연휼민선정각, 丁酉 9월, 비갓 있음), 縣令韓侯覺新永世不忘碑(현령한후각신영세불망비, 癸丑 9월, 비갓 있음) 등 39개가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채 땅에 뿌리를 내렸다.
왼쪽의 비석군은 縣令朴公守弘淸德善政碑(현령박공수홍청덕선정비, 崇禎四年(1631년) 7월, 비갓 있음), 縣令鄭侯亨益剛明惠民善政碑(현령조후형익강명혜민선정비, 乙未 12월, 비갓 있음), 縣令鄭侯基秀永世不忘碑(현령정후기수영세불망비, 壬子 12월, 비갓 있음), 縣令趙宗道淸德善政碑(현령조종도청덕선정비), 縣令李侯益命愛民善政碑(현령이후익명애민선정비, 비갓 있음), 縣令沈公相淸德寬明永世不忘碑(현령심공상청관명영세불망비, 壬申 2월, 비갓 있음), 觀察使鄭公健朝愛民善政碑(관찰사정공건조애민선정비, 乙丑 5월, 비갓 있음), 郡守趙公東敏淸德不忘碑(군수조공속민청덕불망비, 1942년 건립), 郡守吳侯鼎善永世不忘碑(군수오후정선영세불망비), 縣令金侯炳肅愛民善政碑(현령김후병숙애민선정비, 甲申 5월), 縣令金侯履鋼淸簡去思碑(현령김후리강청간거사비, 壬子 三月, 비갓 있음), 郡守李侯鉉昇永世不忘碑(군수이후현승영세불망비), 縣令趙侯□恤民善政碑(현령조후□휼민선정), 觀察使趙公漢國永世不忘碑(관찰사조공한국영세불망비, 癸卯 6월), 縣令趙信鎭大恤民去思不忘碑(현령조신진대휼민거사불망비, 비갓 있음), 縣令尹候舜擧淸簡愛民碑(현령윤후순거청간애민비), 觀察使李公敦相冷簡善政碑(관찰사이공돈상냉간선정비, 비갓 있음) 등 22개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금구면 금구리 소재지에서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에 2개의 비가 서 있다.
이 두 개의 비는 그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며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관찰사 이서구, 현령 정구용의 공적비로 최근에 옮겨져 오른쪽의 첫 번째,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88대 전라관찰사(1794년), 406대 전라관찰사(1820년)를 지낸 이서구, 그의 비는 남원 춘향사당 옆 담장 밑을 포함, 정읍 태인 피향정(보물 제289호) 등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서구는 완주군 봉동의 들판을 보고 장차 이곳에서 향초가 자라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더니만 그후 생강이 생산되었다는 전설을 낳았으며, 고창군 상하면은 ‘훗날 번창하리라’고 말해 구시포항의 발전을 예감하기도 했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배꼽 감실에는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고 전해졌다. 또한 그 감실에 손을 대는 사람도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1820년 전라관찰사로 와 있던 이서구가 마애불의 감실을 열어 보았다. 감실 안에는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열어 보니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대목은 갑자기 친 벼락에 읽어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조필영은 생몰년 미상의 조선 말기의 문신이었다, 1883년(고종 20년) 김제군수로 전 장흥부사 윤(尹)의 비행에 대해 사정관(查正官)이 되었고 그뒤 대구판관으로서 각종 일을 잘 처리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886년 이후 총무관(總務官)으로서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가 되었는데, 당시 직권을 이용, 수세미에 대한 불법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운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1894년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석방됐다.
학교중건비명은 1830년 무렵 당시의 금구현령이던 김○○(이름은 알려지지 않음)가 이 지방의 유지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낡아서 무너진 채 버려진 학다리를 다시 놓고 그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이 비에 새겨진 글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에 금구라는 작은 고을에서 다리 하나를 놓는데 어떠한 과정을 거쳤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그 비용을 마련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비 앞면이 너무 심하게 닳아 없어져서 놓은 과정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밝힐 수 없고, 학다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1700년경에 편찬된 ‘금구읍지’의 지도에는 이 다리가 동도면과 남면 사이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지도에 의하면 학다리는 남면이나 일북면 및 이북면에서 현의 치소(治所)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다리를 놓는 데에는 이 다리를 이용했을 위의 3개 면민들 뿐만 아니라 고을 안 모든 백성이 이에 참여했다.
이것은 아마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즉 ‘학교’ 자리에 돌다리를 놓아야만 금구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세를 누를 수 있고, 또 물이 바짝 마르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설(說) 때문이었던 것 같다.
관찰사서공상정영세불망비는 1870년에 세워진 철비다. 우리는 쇠를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쇠는 무기와 농기구 등으로 사용됐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쇠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사람들은 왜 손쉬운 석비를 마다하고 다루기 힘든 철비를 세웠을까?
고마움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돌보다 철을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내엔 전북대 박물관 앞에 관찰사 이헌구(李憲球, 1784-1854)청세불망비, 무장읍성에 김영곤(金永坤, 참판 역임) 선정불망비 등이 있지만 철비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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