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는 풍수지리상 마을의 형태가 부채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부채울’ 또는 ‘선동(扇洞)’이라고 한다. 1950년대는 마을 앞에 큰 샘이 있어 ‘대정(大井)’이라고 불리워졌다. 해정마을은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어와 바다의 게가 기어올라오고 웅덩이나 못에 박혀 살고 있었다고 해서 해정(蟹井)으로 불렀다. 하지만 게 해자가 쓰기 불편하다고 해서 바다 해자를 써서 해정(海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해정마을 입구에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리는 우물이 있었다.
해정마을은 제주양씨(濟州梁氏)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곳으로, 양채용(梁采龍)의 효행을 기려 세운 효자각(孝子閣)이 모정 앞에 위치한다. 정려각에는 비석 1기와 정려가 걸려 있다. 정면에는 “孝子贈童蒙敎官濟州梁采龍之閭”라 되어 있으며, 건립 연대는 고종 13년(1894)이다.
그의 자는 인택(仁宅), 호는 경모재(敬慕齋)로, 명수(命洙)의 장자로 출생했다. ‘출천지효(出天之孝)’ 즉 하늘로부터 타고난 효를 실천한 그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밭을 갈고 나무를 구했으며, 고기 등을 잡아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다. 18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저수지의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는 등 전국을 떠돌면서 약을 구했다.
조선 말 많은 가정에는 문자도(文子圖) 병풍이 있었다. 글자를 써놓고 그 위에 여러 그림을 그려놓는데 이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자가 ‘효·제·충·신·예·의·염·치’이다. 이 그림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효’ 자를 보면, 보통 잉어 한 마리가 글자 위에 그려져 있다. 중국 왕상(王祥)의 효행담은 유명하다. 그의 계모는 악독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계모는 잉어가 먹고 싶다고 안달했다. 엄동설한이었지만 왕상은 얼음을 깨고 강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얼음이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쳐나와 왕상에게 안겼다. 계모에게 정성껏 끓여드려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양채룡은 이같은 ‘왕상부빙(王祥剖氷)’을 몸소 실천했다. 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뜯어 피를 내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했으며, 끝내 상을 당해서는 예도에 따라 법도있게 치렀는가 하면 홀로 계신 아버지가 7-8년 동안 병석에 눕자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는 등 극진해 간병했다. 그후 70세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무릎을 꿇은 자리가 구덩이가 패였고, 머리털은 빗지 않아 칼로 잘라야 할 정도였다. 그가 1847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동몽교관(조선 시대,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에 증직됐다. 반드시 효도는 돈이나 재물로서가 아닌, 진정한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고향에 살고있는 부모님이 생각나는 오늘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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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수(姜天秀)의 『거산유고(巨山遺稿)』에 이같은 내용이 기록됐으며, 그가 실제로 유래를 기로 썼다.(효자양공표려기)
이칭/별칭; 중민(仲民),거산(巨山)
지역: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이다. 1863년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춘파(春坡) 강인회(姜寅會)이다. 1832년 강인회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장성으로 이거하였다.
[활동사항]
강천수(姜天秀)는 할아버지 강인회의 권유에 따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경전과 백가서(百家書)를 배우고 익혀서 학문과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다. 1897년(고종 34) 종숙인 강해영(姜海永)의 권유로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로 이사한 뒤 서당을 열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1908년(순종 2)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 달려가서 도와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만년에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암치리 서쪽 계곡에 정자를 지어 거산정사(巨山精舍)라는 편액을 달고 쉴 곳을 마련하였다. 그는 괴이한 재기가 넘치는 호걸로 학처럼 우뚝한 선비였는데, 붓을 들면 물이 흐르듯 하여 다시 다듬어 시문을 꾸미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1951년 향년 89세로 죽었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강천수는 가학(家學)을 계승한 뒤 기우만의 문하에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스승 기우만의 학설을 승계하였다. 특히 그는 기정진의 「외필(猥筆)」과 「납량사의(納凉私議)」는 일찍이 없었던 도학의 기본이라고 신봉하였다. 기우만의 『송사문집(松沙文集)』을 비롯하여 『은휴집(恩烋集)』, 『치재집(癡齋集)』, 『모산집(茅山集)』, 『물기재집(勿欺齋集)』 등을 교정하고 다듬어서 간행하였다. 저서로 『거산유고(巨山遺稿)』 4권 1책이 있는데, 4백 수의 시문과 210편의 각종 문장이 들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