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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전북의 철비(鐵碑)

 

 

 

 

‘춘향 모친이 들어온다 이 소문을 늦게야 들었든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관문 앞으로 우르르 춘향 앞에 엎더지며 “아이고 내 딸이 죽었네. 아이고 이 몹쓸 년아! 누가 너를 열녀라고 석비 철비 세워줄 거나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이방상존 호방상존 내 딸이 무삼죄요 칠십당년 늙은 년이 진외원족(眞外遠族) 하나없이 다만 독녀춘향하나 열쇠경 한 막대로 행실공부를 일 삼드니 이 지경이 웬일이요 제 낭군 수절한디 그게 무삼 죄가 되어 생목심을 죽이였소. 나도 마자 죽여주오 !”

 

춘향전 가운데 춘향의 어머니가 말한 대목을 보면, 당시에 철비(鐵碑)가 유행하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보통 비(碑)란 각종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등에 새겨 놓은 것으로,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비, 탑비, 신도비, 사적비, 송덕비, 공덕비 등으로 구분된다. 철로 비를 만드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거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건립했다.

1939년 12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전남 순천의 한 농부가 밭일을 하다가 철비를 발견했는데, 고물상들이 찾아와 팔기를 강요하지만, 밭주인은 후손들이 찾아가기를 바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근대까지만 해도 철비는 우리네 이웃 누구나 알고 있던 살아 있는 문화재였다.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는 채 말없이 산 밑을 지키고 있지만,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철비는 현대의 전광판에 비견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홍보물이자 최첨단 기술로 만든 광고물에 다름 아니다.

철은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목적으로도 이용돼 왔다. 철은 곧 금(金)이다. 오행에 있어 ‘금’의 기운을 보면 ‘금’은 대지를 뜻하며, 그 색은 황금이며 황금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찬란한 휘광이다. 또, 금은 모든 쇠, 또는 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음의 기운에 속한다. 금은 단단하고 변함없으며, 절대 부서지지 않는 강인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 이승이 양이라면 저승은 음이다. 이러한 오행사상과 철이 지니는 가치 때문에 철로 비를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비.석비.철비를 언급하면서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다는 기록을 남겼다. 어찌 보면 철비는 청백리에 대한 민중의 최고 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비의 머리에는 다양한 문양이 조각됐다. 서산군청 앞 철비는 일월칠성(日月七星)을, 전남 화순 에서는 청정을 상징하는 연꽃, 경남 지역에서는 부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모란꽃 등을 즐겨 표현했다. 경남 거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부사 박규동의 청덕선정비는 철비에 석재를 둘렀다. 철비가 빗물로 인해 녹이 스는 것을 막고, 석비보다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모양새를 보완함으로써 격을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역사관이 조사 결과, 전국 23개 지역에서 현존 철비 47기를 확인했으며,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는 1631년 제작된 충북 진천군 ‘현감이원명선정거사비’와 경북 경주시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이며, 다음으로 강원도 홍천군 ‘현감원만춘선정비(1661년)’가 있다.

조선시대 철비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1684년 제작으로 서당을 운영하기 위해 창립한 전남 진도 학계(學契)비 등의 사적(史蹟)비, 보부상 들이 세운 송덕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히 철비는 17~18세기 들어 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닌, 역설적으로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증가하며,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후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북 울진의 ‘내성행망비’는 보부상의 우두머리였던 접장과 반수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이다. 그리고 ‘홍천철비’의 경우 비 뒷면에 ‘장인내금이(匠人奈金伊)’라는 비 제작자의 이름을 남겼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던 파격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전남 진도의 ‘학계(學契)철비’는 마을 공동으로 서당을 건립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재원을 갹출한 사실을 전하기 위해 조성, 예나 지금이나 우리네 부모들의 자식사랑에 대한 전통은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기 위해 군수물자로 빼돌리면서 많은 철비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해 파손된 것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전국에 30-50여기 가량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북 도내의 경우 전주 2기, 군산 3기, 고창 1기, 김제 2기, 정읍 1기 등 보고 연구된 것은 현재까지 9기에 불과하지만 전국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철비가 많아 체계적인 학술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도내에는 고창 무장읍성에 ‘전참판김영곤선정불망비’가 있는 것을 비롯, 김제 금구향교 앞에 ‘관찰사서공상정영세불망비’, 군산 임피향교에 ‘현령홍후재정애민선정비’와 ‘어사이돈상영세불망비’, 전북대학교 박물관엔 ‘관찰사이헌구청간선정비’, 국립전주박물관에도 1기의 철비가 있으며, 최근 정읍에서도 1기가 발견됐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국립전주박물관의 소장품인 ‘현감이영공희하애민선정비’가 1738년(乾隆 三年 戊午 3월)에 건립, 가장 오래됐다.

이 철비의 출처는 남원시 운봉면 신기리 448-10, 전체 높이는 108cm, 너비 41cm, 두께 6.8cm다. 현감 이희하는 영조 11년(1735년) 9월에 취임, 영조 14년(1738년) 2월까지 재직, 다음달에 애민선정비를 세운 것 같다. 전면의 서체는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고, 세운 연도는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관찰사이헌구청간선정비’도 관심의 대상이다. 이헌구(1784~1858년)는 전라관찰사 재직 시절(1837년 1월-1838년 12월)의 선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평안감사 시절엔 산성 개축 등으로 국방의식과 무예 숭상 기품을 진작시켰다.

 

청혜간혜(淸兮簡兮) 맑은 기품에 간결한 일처리였네

불현기광(不顯其光) 그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이여

구이익모(久而益慕)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

여하가망(如何可忘)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이헌구를 기리는 4언4구의 비문은 청아한 인품과 신속 정확한 일처리를 한 주인공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진다는 내용이다. 전주 시내의 한 건물 축조 때 발굴된 이 비는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관찰사 서상정(1813-1876, 1866년 11월-1870년 1월)의 영세불망비는 1870년, 어사 이돈상의 영세불망비는 19세기, 전 참판 김영곤 선정 불망비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좀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해보인다.

최근엔 정읍시 소성면 고교리 주정마을에서 1933년에 건립된 ‘철비(鐵碑)’ 1기가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비는 ‘도정(都正)’ 벼슬을 지낸 은진하가 성포면(소성면이 성포면, 소정면이 통합)의 호세(戶稅)를 대신 납부, 주민들이 그 은공을 잊지 않고자 면에서 세운 것으로 전면에 적혀 있다. 후면에는 대정(大正) 2년 9월로 1913년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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