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김경신. 그의 생년일은 알지 못한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몹시 추운 어느 날, 토함산 남서쪽으로 마주 보이는 산 아래 낮고 평평한 구릉에 묻혔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능을 걸다’라는 의미의 괘릉(掛陵)은 그렇게 생겨났다. 아 당시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이고도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괘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통일신라 원성왕릉(사적 제26호)을 말한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익산도 이색적인 석상이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76호 남궁찬묘석상(南宮璨墓石像)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남궁찬 선생의 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상이다. 이는 문신의 형상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놓여 있다. 일반 묘석상처럼 묘 앞에 시위하듯, 좌우로 벌려 서 있다. 두 석상이 같은 형식의 관복을 입고 있으며 모습도 머리에 둥근 모자를 쓰고 있고 광대뼈가 나온 긴 얼굴에 뚝 튀어나온 눈, 얼굴에 비해 작은 코 등 서로 비슷하다. 이같은 형식은 여느 문·무인석상과 다른 특이한 것으로서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양손을 배 앞에서 소매 속에 감춘 모습만 일반 석상들과 같을 뿐 전체적인 모습도 이국적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석상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승이나 돌하르방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익산은 이같은 사례를 통해서도 돌의 고장이다. 백제 시대 석재 문화의 근원지로 석산이 많다. 익산 황등석재 하면 그 명성은 가히 세계적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돌의 고장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까닭이다. 말 없고 무뚝뚝한 이들 묘지기들이 오랜 시간 한 가지 직업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돌의 문화가 지닌 유구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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