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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고창과 여산 척화비


                                                            [고창읍성 척화비]


척화비(斥和碑)1871년 흥선대원군(1820~1898)이 전국 각지에 쇄국 정책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하지만 비석들의 높이는 다소 차이가 있는 바, 부산의 척화비는 1.8m인 데 비해 함양군 함양읍의 것은 1.2m이다. 그러나 너비는 대체로 4045이고, 두께는 대체로 25정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의 형식을 하고 있는 것은 모든 척화비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점이다.

1866년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키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하며,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그 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에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는 내용의 12자가 큰 글자로 적혀 있고, 그 옆에는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는 내용의 12자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로 거의 모든 척화비가 철거됐다.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철거 후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보관됐다.

신미양요 이후 서양을 향한 항전을 선포한 척화비는 전북의 경우, 고창읍성과 여산동헌에 남아 있다. 고창읍성의 척화비는 읍성의 공북루 오른편에 위치한다. 1871년 대원군에 의해 척화비를 세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고창에서는 1872년 고창현감 이동석(李東奭)의 주도로 척화비를 세웠다. 비 앞면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뒷면에는 上之九年 壬申五月 日 行縣監 李東奭 奉敎立이라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107×39×22cm이다.

여산동헌의 여산척화비는 20025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됐다. 이는 비문이 선명하고 서체는 해서체이며, 크기는 높이 114cm,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通碑)이다. 역시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산척화비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를 현재의 여산동헌으로 이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8일 국빈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살아있다면 이를 두고 뭐라고 말을 했을까.

 

                                                                    [여산동헌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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