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이종근 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 부국장(수필가, 다큐멘터리 작가)
금빛 햇살이 어찌나 유혹하는지 자연의 향기따라, 이름 모를 들꽃 향기따라 촉촉히 상념에 젖어봅니다. 어느센가, 지붕 같은 하늘채에는 흰구름이 윤무하고 침실 같은 대지와 출렁이는 저 하늘 밑엔 푸른 산과 꼬막 등 같은 사람의 집, 아름다운 우리네 산하가 천년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앞다투어 쑥쑥 커 가면서 해맑은 웃음을 짓습니다. 한국의 자연은 그렇게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넉넉함, 겨울의 순결한 눈꽃을 통해 계절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는 오늘에서는.
그대여! 오늘, 당신 닮은 옥색 한지를 샀습니다. 내 맘 가득 담은 종이 위에 물길 트이고 소슬한 바람도 살랑살랑, ‘고향의 골목’ 고샅이 사라진 지금 삶이 소살거리는 곳에 마실을 나왔습니다.
지붕 같은 하늘채에는 흰구름이 윤무하고 침실 같은 대지와 출렁이는 저 하늘 밑엔 푸른 산과 꼬막 등 같은 사람의 집, 아름다운 개울가가 수 천년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시골집 작은 안마당 장독대에 석양빛 서서히 내리고 있습니다. 붉은 햇살은 처마에 걸터 앉았다가 한 나절 잘 쉬었다 간다고 인사를 합니다. 시나브로, 대금 소리와 함께 타닥타닥 불 지피우는 소리가 들리면 목청 큰 소리꾼의 함성이 서서히 잔잔해지면서 밤은 이내 더욱 깊어지고 그윽한 정취를 선사합니다.
심관 이형수작가가 낫으로 가늘고 긴 낭창낭창한 왕죽을 한웅큼 베어 왔습니다. 합죽선에 돌 하나 올리고, 별 하나 얹고, 바람 하나 얹고, 시 한 편 얹고, 그 위에 인고의 땀방울을 떨어 뜨려 소망의 돌탑 하나를 촘촘하게 쌓아 당신에게 수묵(水墨)편지를 띄웁니다.
'드러냄'과 '드러남'의 차이를 아시나요? 어느 때부터인가 '드러남' 보다 '드러냄'을 중요시하는 흐름이 우리 사회 속에도 들어왔습니다.
작가는 드러남을 추구하는 합니다. 일례로, 무섭고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그림에 등장할 때는 익살스럽고 친근하게 그려집니다. 더욱이 호랑이와 함께 등장하는 까치는 기쁜 소식만 들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그림에 함께 그려집니다. 작가는 고독의 흔적을 함께 기억하기 때문에 까치와 호랑이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붓끝을 타고 내린 먹물이 화선지 위에서 마음빛이 되기까지 오랜 수련과정을 겪은 작가는 그렇게 기다림 끝에 웃음을 만들어내는 해학과 눈밝은 수행자의 모습을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불교에 심취한 헤르만 헤세, 종치기 권정생 동화작가한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실존인물의 사상과 정신을 그림에 옮겨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을 본받게 하고자 하는 그만의 독특한 조형의식의 발로인 셈입니다.
또,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미당 서정주 작가를 주제로 한 ‘소설가와 시인의 두 마음’은 이보게! 친구. 초의선사는 늙어감과 낡아감은 차이가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시는가에 대한 답을 전해주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보게! 친구.뭘 그리도 고민 하능가. 이리와 나와 함께 차나 한 잔 먹고 가소. 이보게! 친구. 차를 따르게 차는 나에게 반만 따르게. 반은 그대의 정으로 채워주게.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이 도(道)가 아닌가. 이보게! 친구. 늙을 것인가, 낡을 것인가? 작가의 메시지입니다.
작가의 손을 거치면 어느 새, 기억 속 풍경 위에 자유로운 터치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수묵채색으로 작업되어지는 작품들은 먹빛의 농담과 붓 터치, 그리고 물감의 번짐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까닭에 느낌이 편안합니다.
자유분방한 필묵의 경쾌한 속도감이 두드러지는 작업 등 다채로운 표현의 미학을 살려 작품 속에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산수풍경과 온갖 동식물은 투명하리 만치 맑고 담백한 맛을 자아냅니다. 무엇보다도 담담한 이미지를 통해 시선을 아주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작가는 자연의 형태 속에서 물질적인 실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보며 그 섭리를 가능케 하는 정신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푸른 산도 자연이요, 푸른 물도 자연 그것이로군요. 산도 자연이요 물도 자연인데, 그 산수 사이에 살고 있는 인간인 나도 자연 그것이로군요. 이같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인 나도 자연 그것이로군요. 작가는 도연명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자연대로 하리라 다짐합니다.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절로 매인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으니, 따라서 모든 것이 허허(虛虛)요 자재(自在)로다. 이쯤이면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있고, 신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때론 청계수조(淸溪垂釣), 낚싯대를 드리우며 향기 나는 하루를 만들기도 하니, 이 모두가 작품의 소재에 다름 아닙니다.
난초는 맑고 담담함을 나타냈고, 국화는 소박하고 부드러우면서 향기 짙은 이 작가의 심성을 잘 표현합니다.
“사군자 중에서 하나를 딱 꼬집어서 그것만을 작업하는 것은 아니고 고루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필력이 매력적인 난(蘭)과 곧고 강직하면서 오랜 수련이 묻어나야 제대로 맛이 나는 죽(竹)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작가의 문인화는 소재가 다양하기로 유명해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을 좋은 글귀가 있으면 그것 또한 그림으로 그려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꽃이 필 때의 화려함과 꽃이 질때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어우러져 아름다움과 추함이 잘 조화된 ‘허무(虛無)의 경지’에 이른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고은)
우리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조만간 터널이 끝나면 밝은 햇살과 나무와 풀들과 심지어 공기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산 정상을 향해 힘들게 올라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작가는 다시 내려오면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더 많은 세상과 꽃들을 보며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휴식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고 다시금 기원합니다.
시나브로, 산사의 숲은 산들바람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물들었습니다. 하늘 한 번 우러러보니 바람에 실려 떠도는 너울 한자락, 햇빛 사이로 무지개 되어 떠도는 구름이 막 흘러갑니다.
손으로 눌러 쓴 편지의 기억이 까마득하군요. e메일, 문자 메시지, 카카오톡에 밀려 ‘손 편지’가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붓끝에서 피어나는 고향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을 쓰고난 후 마을의 고샅에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이 조그만 조각배 서신에 살듯한 정을 담아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손 편지 한 통을 써서 당신에게 ‘슬로시티’ 편지를 부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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