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가는 바람에도 곧 꺼질 것같이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힘겨운 하루를 보낸 어느 가장의 취기 어린 목소리가 구성지게 흐릅니다. 문패는 때론 싸구려 나황나무에 그냥 붓글씨로 이름만 쓰고 니스 칠로 마무리를 한 것도 있었는가 하면 때론 나무가 비틀어져 벽기둥에서 조금 떨어져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전주를 예향의 고장으로 서게 한 전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심에 은은하게 묵의 기운이 흐르는 ‘문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엔 돌을 쪼아 만든 문패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천주교 전동교회의 문패
천주교 전동교회와 성심유치원이란 전동성당 입구의 빗돌을 누가 썼는지 아십니까. 부탁하노니, 전동성당을 방문하면, 사제관의 십(十)자 꽃담, 일반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종, 그리고 350년 된 은행나무와 입구의 글씨에도 제발 눈길 한 번 주기를 바랍니다.
전동성당 입구에 서 있노라니, 수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군요, 영화 ‘약속’에서 처럼 박신양과 전도연이 결혼식을 올리면서 반지를 주고 받기 위함인가요.
하지만 천주교 전동교회(오른편)와 전주 성심유치원(왼편)이란 글씨는 중견 서예가 백담(百潭) 백종희(한국서예교류협회 회장)씨가 1986년 해성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 쓴 것이라는 아는 사람들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해성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지인이 ‘전동성당’과 ‘성심유치원’을 휘호해 달라는 부탁을 한 까닭에 식사도 거른 채 몇날 며칠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등 철모르던 시절에 쓴 글씨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살붙이로 긍지를 느끼기도 합니다만, 성당측에 다시 써줄 의향이 있다고 여러 차례 얘기를 했는데 묵묵부답입니다”
바로 얼마 전, 전주시 진북동 ‘한국서예교류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작가는 이같이 말하면서, 한글 판본체로 붓글씨를 썼지만 ‘천’자와 ‘회’자, ‘치’자는 법첩에서,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한글 서예의 경우, 자음에서 위의 첫 획을 내려 세로로 써야 마땅하지만, 이 부분이 잘못돼 전동성당에 다시 써주기로 마음을 먹고 신부를 찾아갔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아직도 그대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이 당시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해성중학교의 김병오 미술 선생이 전동성당 사목회장을 맡고 있었는데요, 성당의 정문을 새롭게 꾸미고 있으므로, 부서지지 않는, 오랜 기간 남아서 자리할 돌에 쓸 글씨를 쓰라고 해서 지금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작가는 성심유치원이라는 의미에도 담겨있듯 ‘성심(聖心)’을 다해, 아니 ‘성심(誠心)’을 다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소년 조선일보의 문예상에서 서예 대상을 차지, 문교부장관상을 2번이나 받을 정도로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듣기로는 이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학생이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북 전주 해성중(교장=조성호) 2년 백종희(서예부분)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아주 불편한 몸이다. “행상을 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장관상을 드리겠어요. 더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서예가가 되겠읍니다”며 말끝을 흐렸다.
당시의 신문 기사입니다. 이 때는 천주교 전주교구청에선 박정일 주교가 일하고 있었으며, 조성호 해성중학교 교장이 그에게 방 하나를 주어 붓글씨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 외에 학교외 전주교구의 행사 등이 열리는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포스터, 표어 등에 들어 갈 글씨를 수시로 썼으며, 1-2학년 학생들의 서예 지도를 도맡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해성중학교 학생들이 전국의 청소년 예능대회의 상을 휩쓸고 다녔다고 합니다. 1987년 졸업을 할 당시 공로상까지 받기도 한 그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겁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부모가 한밤중에 수업료 걱정을 하는 것을 듣고 나선 학교에서 고지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둘러대다가 결국 자퇴서를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교장이 소년 조선일보에서 대상을 받았으니 학생과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한 후, 자퇴를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서 그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같은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교장이 수업에 들어가지 않을 때면 그 만의 방에 들어와 서예를 하게 하고, 더욱이 수업료까지 면제해 었다고 하는 스토리가 전하고 있는 만큼 천주교 전동교회의 문패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또다른 문패
이밖에 한옥마을 주변엔 남천교개건비, 서천교창건비, 독립운동기념비, 박진효자비, 이목대 목조대왕구거유지비, 오목대 태조황제주필유지비, 경기전 하마비, 남고진사적비, 자만동 금표 등 빗돌들로 넘쳐납니다. 컴퓨터로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 아닌 한 글자 한 글자, 한 땀 한 땀 수공의 힘이 살아 있는 아주 귀한 글씨들은 예맥(藝脈)의 도도한 흐름을 나타내는 상징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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