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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이 땅의 다리 산책’

 

 

전설이 된 다리에 이야기 꽃 피다


[MT서재] ‘이 땅의 다리 산책’…옛 다리 과거·현재 연결한 재미난 스토리텔링으로 초대머니투데이 천상희 편집위원(2016.03.21 07:03)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이야기와 엮여져야 비로소 생명력이 있는 존재감을 획득하여 인구에 회자된다. 거창한 이야기와 엮이면 역사나 전설이 되어 널리 그리고 영원히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엮인 이야기가 빈약할수록 전파력과 생명력은 짧아진다.

이처럼 세상 모든 존재에 가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산이 높아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살면 명산이라는 말도, 비록 풀로 엮은 작은 집에 불과하지만 다산 초당이 유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야기 소재 자체의 유명세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스토리텔링화하는 안목과 능력, 그리고 시대적 환경에 따라 반전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땅의 다리 산책’에 스토리텔링된 다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국구 다리’도 있고, 특정 지역에만 알려진 ‘지역구 다리’도 있다. 물론 전국구와 지역구의 차이는 엮인 이야기의 스케일과 그 다리를 품은 주변 여건의 유명세에 따른 것이다. 가령 6.25 한국전쟁 전후 피란민의 애환과 가슴 아픈 사연이 넘쳐나는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가 가사에 들어가는 가요만 무려 2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20쪽). 이 같은 유명세 때문에 부산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외지인도 영도다리는 아주 친근한 것이다.

다리는 피할 수 없는 생활공간이라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엮이게 된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다리를 건너면서 구전되는 이야기를 듣거나 때론 개인이 특정 다리와 인연을 맺은 추억도 이야기가 돼 다리 밑에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다리에 대한 사유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스토리는 다양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장년이면 누구나 말문이 막 트일 무렵 한번쯤 들었을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난 정말 주워 왔을까” “진짜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어른들 말을 안 들으면 정말로 다리 밑으로 다시 버릴까” 등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것이다. 어린 가슴을 불안케 했던 이 이야기도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어른들이 놀리려고 한 농담임을 알고 한귀로 그냥 웃어넘긴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따로 있음을 안다. 저자가 밝혔듯이 다리 밑 아이는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에 공부하던 선비가 그 동네 처자나 기생과 어울려 정이 들어 원치 않은 아이를 낳았는데, 갓 태어난 아이를 소수서원 인근 ‘청다리’ 밑에다가 갖다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223쪽).

‘청다리’에 대한 유래는 나중에 성교육 수단으로 활용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엄마의 다리 밑 어디라는 것과 정상적인 결혼에 의한 출산이 아니면 불행하다는 사회·교육적 메시지가 있다는 것은 성인이 되면 깨닫게 된다.

다리가 일상적 생활공간인데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은 역사적 사건 등 큰 이야기와 엮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다리는 그 시대의 통치이념인 충과 효와 연관된 것이 눈에 많이 띈다. 개성의 선죽교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인데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절개를 상징하는 대죽(竹) 자로 바꿔졌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이 서려 있는 경기도 안양의 만안교도 꽤나 유명한 다리이다.

경주박물관 인근의 일정교는 큰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과 엮이지 않았지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일명 ‘쑥기떡 어미다리’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이 근처 동네에 쑥기떡을 팔아오던 과부가 칠형제를 기르면서, 건너 동네 홀아비와 눈이 맞아 밤마다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이를 안 아들들이 어머니가 개울을 쉽게 건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줬는데, 후세 사람들이 어머니에겐 효도한 다리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의 다리라 해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 하였고, 또 일곱 아들이 만들었으므로 칠자교(七子橋)로 불렀다고 합니다”(70쪽).

 

선죽교의 전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일정교는 스토리텔러들의 숨은 의도까지 읽을 수 있어야 그 전설의 존재감은 더욱 빛이 난다. 조선시대 과부는 수절하는 것이 미덕이서 아들이 비록 바람은 났지만 엄마를 위해 다리는 놓은 것은 효도이지만 아버지에게 불효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꺼풀 더 벗겨 보면 반전이 있다. 일부종사라는 국가 통치이념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민중들의 이러한 심리를 반영하여 당시 이야기꾼들은 아들이 바람난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본다.

이것은 스토리텔러의 개인적 반항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트렌드를 잘 읽은 것이고, 또 공감가는 내용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이 전설은 오랫동안 전해져 온 것이다. 여기에다가 독특한 캐릭터에 주제까지 분명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본다.

그밖에 불교의 심오한 교리가 녹아있는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이어준 경주의 월정교, 복고 열풍을 타고 최근 축제로 부활한 강원도 정선 주천강 쌍섶다리, 우주 모양을 본뜬 충북 진천의 농다리, 아름다운 다리의 대명사 전남 순천 선암사 승선교 등 다리마다 크고 작은 이야기 거리가 풍성하다.

‘이 땅의 다리 산책’을 다 읽는 순간 ‘뚝배기보단 장맛’이란 속담이 생각이 났다. 현재 생활과 동떨어진 옛날 다리에 대한 단순한 답사기쯤으로 생각했는데 본문 첫 테이프를 끊은 부산의 영도다리부터 맨 마지막 충청도 외암마을 다리까지 호기심을 자극하고 때로는 감동이 밀려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특히 기자답게 문헌은 물론 숨겨진 사연까지 잘 갈무리하여 옛 다리만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로 새로운 다리는 놓았다도 본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그 다리,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마지막 구절처럼 세월이 가도 이야기는 사람들 가슴에 머물 것 같다.

 

◇ 이 땅의 다리 산책=이종근 지음, 채륜서 펴냄, 263쪽/1만4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