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입춘날이나 대보름날 전야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꼭 해야 연중 액을 면한다는 ‘적선공덕(積善功德)’이 있었다.
상여 머리에서 부르는 향도가(香徒歌)에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부처님께 공양드려 염불공덕(念佛功德)하였는가' 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
두말할 필요 없이 다리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든 그곳의 디자인이 세련된 다리부터 먼저 눈길을 주게 된다. 아름답고 역사가 깃든 외국의 다리들을 볼 때마다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다리들이 격조 있는 전통을 잇지 못하고 단절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지금도 산업화시대에 급조된 다리들을 보면 아쉽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의 모든 다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만든 몇개의 다리들은 기능적으로도 뛰어나고 철학을 느끼게 한다. 수표교의 경우, 지금은 장충동공원으로 옮겨놓았지만 단순히 건너가는 기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돌난간이 멋들어질 뿐만 아니라 교각에는 수량을 쟀던 눈금까지 새겨져 있는 돌다리다.
자연과 어우러져 무지개다리라고 불리는 승주 선암사 홍교(虹橋)나 벌교 홍교, 불국사의 백운교, 청운교도 규모는 작지만 외국의 명품 다리와 견주어서 뒤지지 않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상생하는 동양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가운데 공공 공간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현재 수원 화성 내에 존재하는 화홍문 등 수문은 전란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동시에 하천의 범람을 막아 수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러져 군사적·토목기술적인 면에서 뛰어난 교량구조물이다. 낙안읍성의 평석교와 광통교는 무병장수의 꿈을 염원하면서 대보름 등을 맞아 남녀가 서로 만났으며, 남원 광한루 오작교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러브 스토리가 전하고 있지 않나.
파리의 세느강에는 30여 개 다리가 있는 바, 다리 위난 걸어도 파리의 근 현대 역사가 발끝에 전해진다. 이처럼 다리란 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하는 복합적인 공간인 셈이다. '예술의 다리'라고 불리는 1801년에 만든 퐁데자르 다리가 명성이 높다. 카뮈, 사르트르, 랭보 등 작가들이 즐겨 찾아 작품을 구상했던 보행자 전용 다리로, 날마다 거리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몰려들고 석양 무렵이면 젊은 청춘들이 몰려와 밀어를 속삭인다. 미국의 금문교(金門橋)는 붉은색의 아름다운 교량은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데다가 짙은 안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됐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힌다. 다리 양단에 공원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호주는 시드니의 하버브리지 등 경관이 수려한 도시에는 아름다운 교량이 즐비하다.
우리네 옛 다리는 역사적인 삶의 흔적과 정신적인 얼이 담겨져 있으며 과학성이 스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기능적이고 조형적인 다리뿐만 아니라 시공을 뛰어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의 통로로, 단절된 세대 간, 지역 간의 새로운 소통의 통로로 다가와 답답하게 막혀있는 오늘날의 세상을 시원스럽게 뚫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90년에 만들어진 올림픽대교는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사장교로,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4개의 기둥은 동양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근원을 상징하는 년(年), 월(月), 일(日), 시(時)의 4주(住)와 춘(春), 하(夏), 추(秋), 동(冬)의 4계절 및 동(東), 서(西), 남(南), 북(北)의 4방(方)을 나타내준다. 28개의 별자리를 지상에 놓아 백성들의 안녕과 무사를 염원했던 진천 농교처럼 말이다.
하지만 명량대첩이란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 진도대교에는 거북선이나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가 거의 묻어 있지 않았다. <명량>이란 영화가 화제로 떠올라 더더욱 아쉽기만 하다. '우리에게는 왜 역사가 있고, 시가 있고, 낭만이 있고, 미학적으로 뛰어난 다리가 없는 것일까.'
김제 새창이다리(구 만경대교)에서는 매년 시낭송회와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무주 반딧불축제와 영월의 아리랑제에는 섶다리가 놓여지며, 부산의 영도대교, 진천 농교, 경북 무섬 다리, 삽교의 샆다리, 봉평의 효석문화마을의 징검다리 등에서는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리면서 추억을 덤으로 얹혀주고 있는 만큼 그나마 다행이다.
전주천 다리 밑을 수놓은 700여 장의 타일그림을 따라 어린이들이 걸어가고 있다. 벽에 걸린 작품 구석구석에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춘다. 손끝으로 살짝 어루만지고는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고흐의 해바라기나 신윤복의 미인도를 관람하는 듯 한 이 광경은 요즈음 전주천 어은교 등 다리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공공미술프로젝트 '얘들아 하늘밥 먹자(예하밥)'에서 전주천 아래 타일벽화를 그렸던 6~7세 아이들이 세상을 바꾸었다. 어르신들의 쉼터로만 사용되던 침침한 다리 밑에 아이들의 밝고 환한 웃음소리가 더해져 여러 세대가 함께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되살아난 전주천이 수백 장의 타일그림처럼 동심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산길처럼 들길처럼 걸어가라 하네. 햇살처럼 물결처럼 지나가라 하네. 강물처럼 별빛처럼 흘러가라 하네.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하네.
당대의 첨단기술과 조형감각이 집약된 교량은 도시의 아이콘이 되고, 나아가 기념비적인 가치마저 지니게 된다. 교량 설계는 주변 상황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조화로운 경관을 완성해야 한다. 예로부터 강물이 흐르는 곳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았다. 징검다리로부터 나무다리, 돌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다리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제는 손꼽을 정도만이 남아 있다.
지금의 크고 웅장한 현대식 다리에 비하면, 이런 옛 다리들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옛 다리에는 옛 사람들의 지혜와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결코 소홀히 대할 수는 없다. 공공공간으로서 다리를 새롭게 만들거나 보수를 한다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입혀야 한다. 한국의 다리가 사람을 잇고, 사랑을 잇는 역할을 튼실히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월간 환경과 조경 2월호(통권 334호) 칼럼)
이종근 프로필:전주시 ‘문화의집’ 관장, 한국문화의집협회 부이사장 등을 거쳐 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프레스센터,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한국언론진흥재단 등 기획 출판 대상에 6회 선정됐다. 1994년 ‘문예연구’ 신인상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2010년 제1회 대한민국 신화창조 스토리 공모대전(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우수상을 받으면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데뷔한 후, 2011년엔 KBS-1TV를 통해 ‘꽃담의 유혹(2부작)’이 추석 특집물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 동네 꽃담』, 『한국의 옛집과 꽃담』, 『이 땅의 다리 산책』 등을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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