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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한옥마을의 종교

 

 놋쇠 그릇에 담겨진 전주비빔밥은 30여 가지의 재료가 들어간 한국 음식의 오케스트라로 멋진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전국 최대 규모의 한옥 밀집촌으로 조선의 발상지인 전주시 교동 주변이 한국 종교의 ‘축소판’으로 ‘백화점’으로 전주비빔밥의 상생정신을 잘 보듬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교동과 전동 등 한옥마을 일대에 둥지를 튼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4대 종단은 물론 천도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무속신앙) 등 기본적으로 10여 개에 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점집을 제외하고서도 한옥마을에는 공인된 종교 시설만 불교 , 기독교, 각 종파 등 모두 헤아려 보니 20여 곳에 이릅니다. 이들 종교시설은 해당 종교가 뿌리내리는데 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와 고난이 뒤따랐는지를 잘 보여주면서도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도 더욱 풍부합니다.

 

△전동성당과 사제관

 

 경기전 앞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은 소박하고 아담하지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습니다. 또, 전동성당 사제관(전북 문화재자료 제178호)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남문교회와 서문교회

 

 남문교회는 호남지역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에 이어 두번째 교회로 세워져 왕성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1905년 전주서문교회에 출석하던 마로덕 선교사와 최국현 장로 등 20여 명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교회란 자료가 보입니다. 1832년 독일인 구츠라프에 의해 처음 소개된 개신교가 전주에 들어와 포교하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여름의 일입니다. 이 해 여름 리눌서 목사가 정해원씨를 전주에 보내어 전도도 하고 선교사가 묵을 집을 사게 함으로써 전주에서의 개신교 활동이 시작됩니다. 6월 전주에 온 정해원은 완산칠봉 아래 은송리에 26달러를 주고 초가집 한 채를 마련, 전도활동을 벌였으며 같은해 9월에는 테이트와 전킨이 전주에 머물면서 향후 선교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테이트 등이 전주에 묵고 있을 때 ‘양반만이 살고 있는 전주 땅에서 양인들은 물러갈 수 없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양반도 있었다고 하며 서양 귀신을 쫓아낸다는 ‘축귀양인(逐鬼洋人)’ 네 글짜를 써 등에 붙이고 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합니다.  1894년 3월 테이트 등이 전주에 정착하면서 본적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가지만 곧이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때문에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직후 1895년 2월 레이놀즈와 테이트 일행은 은송리 초가집을 다시 마련한 뒤 그해 11월 선교활동을 재개합니다. 같은 해 처음으로 호남 최초의 개신교회인 전주 서문밖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동고사와 승암사

동고사(전북 문화재자료 제2호)는 기린봉 기슭에 있는 절로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며, 그후 헌종 10년(1844년) 허주대선사가 현 위치에서 중창한 후 소실되었던 동고사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게 오늘의 명칭으로 굳어졌습니다. 인근에 승암사와 남고사 등 여러 개의 사찰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전주향교

 

 전주향교(사적 제379호)는 전주향교 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과 전주향교소장완영책판(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등 3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곳으로, 원래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사적 제339호) 근처에 있었습니다.
 오목대 밑자락 기린로변에 자리한 전주향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관찰사 장만이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설립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1354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는 풍남동(경기전 북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거정의 『부학기』에 의하면, 원래 향교가 치소 내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선 뒤 향교와 진전이 너무 가까워서,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고 해서 향교를 성의 서쪽 6,7리 되는 곳으로 옮겼다 합니다. 이 때 향교가 옮겨 간 곳이 지금의 화산 신흥학교 부근입니다. 부지가 너무 넓고, 부중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도둑이나 호랑이로부터 화를 입을까 염려한 나머지 담장을 높이 둘렀다고 하니, 당시의 전주 모습이 짐작이 갑니다. 1603년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공자의 사당),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옛 법도에 어긋난다고 해서 부성 밖 동편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천도교 전주교구와 원불교 교동교당

 

 천도교 전주교구는 은행나무골에 자리,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5월 31일 동학혁명기념관이 개관, 운영중입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 동학 관련 고서와 표영삼이 수집한 동학의 창도부터 혁명의 최후 항전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의 역사 현장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100여 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또, 1965년 세워진 원불교 교동교당과 1966년 둥지를 튼 도교가 종교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원기50년(1965년) 첫 발을 내디딘 원불교 교동교당은 전주교당(원기19년 설립) 이후, 전주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교당이라는 교단사적 차원 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원래 이곳은 전주교당이 현 교구청 자리인 경원동으로 거취를 옮기기까지, 원기28년(1943년)부터 14년 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전주교당 이전 이후 일시적으로 전주양로원이 건물을 사용했으나, 당시 전주양로원 총무 정응문씨가 원기49년(1964년)부터 교당의 업무를 대신해 출장법회를 보던 것을 계기로 선교소 인가를 받았으며, 1965년  6월 신제근 교무가 초대교무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단독 교당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교동교당은 현재 150여 명의 교도와 원광어린이집, 소담원(일원정사)을 한옥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주문화원 김진돈 사무국장은 “한 동네에 전주 한옥마을처럼 수 많은 종교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은 없고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시설이 밀집된 곳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역사와 사회성을 잘 반영, 전주비빔밥이 지닌 화합과 융합의 코드를 나타내는 징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