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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한옥마을의 굴뚝

 

우리나라의 건축은 굴뚝조차 예술이 됩니다. 그 사례로 경복궁의 예쁜 굴뚝들이 꼽힙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세히 보아야 굴뚝인 줄 알만큼 예술적입니다. 자경전이 보물 809호이고. 이 굴뚝이 따로 보물 8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보물 811호입니다. 아미산은 조선 태종이 경회루를 세운 연못을 파고 난 뒤 그 흙으로 왕비가 사는 교태전 뒤에 세운 인공 동산입니다. 이 굴뚝은 6각형으로 한껏 멋을 냈고, 소나무 매화 불로초 학 박쥐 같은 것을 무늬로 넣었습니다.

폼나는 궁궐 굴뚝보다도 평범한 사대부집이나 민가의 질박한 굴뚝들이 더욱 더 정감이 갑니다. 키작은 흙기둥에 기와 몇장 턱턱 얹은 품새가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언뜻 꼬마 병정처럼 귀여우면서도 저렇게 연기를 내는 중요한 기능을 해내는 모습은 마치 장군처럼 의젓하지 않은가요. 키작은 굴뚝처럼 낮게, 겸손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은 굴뚝에 기와 지붕을 얹어 꾸미는 집주인의 마음을 한번 상상해봅니다.

학인당은 1908, 전동성당사제관은 1926년 승광대 옆 전주 최부잣집은 1937년에 건립된 바 이 때부터 굴뚝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같이 본다면 학인당의 굴뚝이 제일 오래됐으며, 전동성당사제관은 제일 많은 6개의 굴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크기면에서는 전동성당사제관, 그리고 여름이면 넝쿨이 치렁치렁 달리는 학인당과 전주최부잣집이 서로 양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뚝 솟아 한옥마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집채만한 아니, 집채보다 더 높아 하늘 아래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전동성당 사제관, 6개의 굴뚝 간직

우리나라는 전동성당사제관 모두 5개의 사제관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전동성당 사제관(전북 문화재자료 제178)은 십()자 꽃담과 굴뚝이 아름다우며, 그동안 유지관리 상태가 양호하고 우리나라 초창기의 양식 건축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사제관은 1926년에 지어진 건물로 전동 본당 건립 후 2대 주임신부였던 라크루시니부가 장차 전주교구가 설정될 경우를 대비해 만든 공간입니다. 1937년 전주교구청사 및 교구장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이후부터는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면을 제외한 지붕의 3곳은 좌우에 굴뚝을 대칭으로 세운 바 모두 6개의 굴뚝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하필이면 대칭이었을까요. 남녀의 조화, 음양의 조화, 젊은이와 어르신들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까요. 생명의 공간 즉 생성의 원리를 운용하는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조화속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교합하며 무한한 생명의 순환을 엮어내고 있습니다. 라크루신부는 장차 전주교구가 설정될 경우 전주 본당은 주교좌 본당이 될 것이므로 이에 걸맞는 건물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192615,000원을 들여 사제관을 먼저 건축합니다. 동료 선교사들의 말대로 그는 전라도의 수도(首都)에 걸맞는 사제관을 지었다

라크루신부는 1925년경 유행성 감기에 걸린 환자에게 병자성사을 주다가 감염됩니다. 그후 폐병으로 건강이 날로 나빠졌고, 미사를 드리지 못하 정도로 악화돼 끝내 완치되지 못했습니다. 1929811일 새벽 1시경 만성페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선종을 합니다. 확신하건대, 답답한 사막의 지표면을 뚫고 새 순을 드러내는 선인장보다 강인하게 생명의 소중함과 부활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묵묵히 제 십자가를 이고 지고 가는 착한 사제들 덕분입니다. 그래서 사제관의 굴뚝을 볼 때마다 나의 교만한 눈빛, 일그러진 표정 하나 때문에 사랑을 잃고 상심에 젖을 법한 사람들의 눈망울을 생각해봅니다.

전주최부잣집과 학인당의 굴뚝, 누가 더 크나

 

굴뚝에는 이를 지키는 굴대장군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요. 전동성당 사제관 외에 학인당, 오목대 사랑채, 양사재, 동락원, 전주한옥생활체험관, 국악의 집 한옥체험관, 승광재 옆 최부잣집 등에서도 굴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주 최부잣집의 정원은 한옥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당초에는 2개의 굴뚝이 있었던 바, 사랑채 굴뚝은 사라졌지만 안채의 것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학인당과 함께 가장 키가 큰 굴뚝이 아닌가 합니다. 여름이면 키큰 식물이 담쟁이처럼 벽을 하고 하늘높이 올라가 한옥마을을 맘껏 구경한다고 합니다. 양사재의 경우, 2015년 여름까지 장작으로 방을 따스하게 만드는 온돌방이 있었지만 지금은 운영하지 않아 아마다 전주한옥생활체험관만이 구들방의 추억을 간직한 유일한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도시가스로 방에 불을 지피우고 있어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 하나둘씩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구수한 된장찌개 향이 코끝을 자극할 때 즈음 어머니의 얘야 밥 먹어라라는 부름에 아이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달려갔지요. 학인당의 구수한 된장 냄새는 따뜻한 어머니 품을 기억하게 합니다. 학인당은 오래된 종택을 아담하고 소박하게 다시 꾸며 누구나 편하게 쉬다갈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이곳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이 머물렀다고 하여 그들이 머물렀던 방에 백범지실’, ‘해공지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객실은 단독 화장실을 갖춘 것이 대부분이지만 장작불을 때는 구들방에는 화장실이 있는 것이 좋지 않아 실내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학인당의 키큰 굴뚝은 원래 4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입구의 오른쪽에 하나만 달랑 남아있습니다. 예전의 굴뚝 하나와 키작은 굴뚝 2개 등 3개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장작불피워 굴뚝 연기 모락모락

 

전주한옥생활체험관의 굴뚝 연기를 보면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고, 또한 그리워집니다. 어머니가 솥에 가득 밥을 해놓고 기다리실 것만 같습니다. 해 저무는 들판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굴뚝에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저녁을 푸근하게 합니다. 저무는 한옥마을에 겨울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 타고 퍼져오는 구수한 밥 냄새와 장작 타들어가는 냄새는 가슴속 깊이 숨어있던 어린 시절 그리움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곳은 여전히 세화관 뒤에 굴뚝이 존재하며 장작으로 불을 지피우는 온돌방(구들방)2개가 자리하며, 2인 기준 10만원-12만원을 내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화관(世化館)이란 이름처럼 세상의 조화로움을 꿈꾸어봅니다.

 잘 마른 소나무 장작 두어 개를 아궁이에 던져 넣자 금세 불이 옮겨 붙더니 장작 타는 정겨운 냄새가 좁은 마당을 가득 채웁니다. 황토 굴뚝에선 구수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원앙금침(이불)을 깔아둔 아랫목에 손을 넣는 순간 앗 뜨거소리가 절로 튀어나옵니다. 이곳은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구들장의 추억을 되살려 주는 소박한 민박집입니다. 굴뚝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천년만년을 이어 나갈 전주 문화의 상징 문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은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이곳에서 살랑살랑 솟아나는 감자 굽는 냄새가 나는 굴뚝, 특히 음식과 밥내가 묻어 있는 그런 굴뚝이 아닌가 싶습니다. 굴뚝 연기는 생활의 향기요, 당신을 이끄는 소통의 얼굴로 자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