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을 연극 같다고 한다. 표절 같지만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연극 같은 인생, 어떤 연극엔 눈물이 난다. 배우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고 관객의 함성에 동조한다. 어떤 비극에 알 수 없는 감동이 일기도 한다.
어린 시절 시골장터 변두리에는 약장수가 들어왔다. 추수가 끝난 논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여러 가지 구경거리를 공연하면서 약을 팔았다. 대중가요, 연극, 창, 각설이타령 등은 그 시절 농촌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만병통치약이 등장하는데 약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였다.
이수일과 심순애, 심청전, 장화홍련전, 흑백TV도 귀하던 시절 인형처럼 예쁜 사람들의 화려한 옷과 화려한 분장 등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그런데 선생님들이 나타나 비겁하게 뒤에서 귀를 잡아당기며 학생들을 내쫓곤 했다. 시험에 연극의 3요소가 뭐냐고 물으니 무대, 배우, 관객임을 공부하기위해 왔을 뿐인데 지금도 섭섭한 추억이다.
전주체련공원에 ‘전북 연극의 선구자’ 극작가 박동화문학비가 겨울을 맞고 있다.
흉상이 아직도 대본을 손에 쥔채 “나의 독백은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독백, 인간의 독백은, 지구의 운명이 마지막 될 때 역시 지구의 운명과 같이 한다"며 소리문화의전당 무대의 막을 올릴 태세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통해 전북 연극을 재조명하기 위해 1999년 청동주물로 된 2m 높이로 세웠다. 좌대에는 고인의 대표 작품인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주요 대사가 새겨져 있다. '전북연극의 산파' '전북연극의 개척자'라는 수식어와 함께하는 극작가 박동화(朴東和,본명: 박덕상·1911-1978)의 고향은 전남 영암이다.
그는 1928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중학교를 퇴학, 서울로 가 조선연극협회 회원으로 신극운동에 참여한다.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동경에서 잠시 극작과 연출 수업을 받기도 했다. 한글잡지 목포호남평론과 경향신문 군산지국장, 군산민보 편집국장, 목포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일제와 공산당의 탄압을 받기도 한다. 그 사이 여러 편의 시와 소설, 수필과 평론 등에 주력하던 그는 '박동화'란 이름으로 연극 <수전노,1936>에 출연하기도 하고, 희곡 <수해 후,1937>를 발표하기도 한다.
이어 1956년 전북대학교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전주와 인연을 맺은 그는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전북의 연극판을 열기 시작한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1961>, <여운,1962>, <정직한 사기꾼,1962>, <왜 싸워,1963>, <두 주막,1964>, <대춘향전,1965>, <우리들의 뒷모습,1967>, <용감한 사형수,1969>, <망자석,1970>등 박동화의 연극이 전북예술을 풍요롭게 했다. 3시간이 넘는 대작 <바다는 노하고 산은 울었다, 박동화 작·연출>을 끝으로 마감한다. 그 후 박동화연극상이 제정되어 매년 6월 체련공원 흉상 앞에서 시상식을 열고 2007년에는 (사단법인)동화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전북 연극의 시작과 한 중심에 선 박동화 선생은 전북 현대연극사에서 보물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양규창.(시인. 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