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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지금, 부산 영도다리로 온나~"

"지금, 부산 영도다리로 온나~"

부산=이종근기자

‘변관식필영도교’(卞寬植筆影島橋, 동아대학교 박물관,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28호)는 대표적인 한국화가 소정 변관식이 그린 영도다리 그림입니다.  작가의 활동과 예술성이 높이 평가됐지만, 심의하던 시점에 영도다리 보존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였다는 점도 문화재 지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입니다. 이 작품은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이 1948년에 영도다리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입니다.  이 작품은 부산의 근대화된 풍물을 그린 실경산수화로 1950년대 이후 변관식의 화풍 변화를 보여 준다는 점, 공백기로 남아 있던 1948년 변관식의 행적을 밝혀주는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해방 직후의 부산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근대 회화사 및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화면은 오른쪽의 용두산 방면 풍경, 왼쪽의 영도 방면, 그리고 가운데에 두 지역을 이어 주는 영도다리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지금은 없어진 옛 영도경찰서, 옛 부산부청(釜山府廳) 건물 등이 묘사되어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 용두산, 복병산(伏兵山), 구봉(龜峯)이, 다리 너머로는 구덕산(九德山)과 아미산(蛾眉山)이 보이고, 영도대교가 들려 있는 상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윗부분에 있는 오언절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鐵粱揭而闢(철량게이벽) 영도다리 높이 들려
船出海通門(선출해통문) 배가 이를 문 삼아 지나 바다로 나아가네.
機事紛綸外(기사분륜외) (다리 올리는) 기계소리는 시끄러운데
遙山靜自存(요산정자존) 먼 산들은 고요히 그대로 있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영도다리에 목을 놓아 불러본다, 금순아 어데로 갔나….”여러분들에게 부안의 영도대교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나요. 혹시,  기억과 추억의 차이를 아세요? 잊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기억이고, 아련해지는 것 추억입니다. 세대 차이가 날 만할 노래를 해봅니다. '기억'과 '추억'의 차이는, 기억은 모든 것을 '추억'하지 못하지만 추억은 모든 것은 '기억'합니다. 다행히도 행복했던 기억은 슬펐던 기억보다 오래 가기에 모든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가 부산 원도심 역사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원도심 근대역사 골목투어’를 개발, 2015년 6월 14일부터 스토리텔러 이야기 할배·할매를 안내자로 파견, 국내외 관광객을 맞고 하고 있면서 우리들의 기억과 추억을 되뇌에게  합니다.
 이  관광 코스는 부산의 원도심인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에 산재한 근대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체험형 상품으로 개발됐습니다.  코스는 △영도다리를 건너다 △용두산에 올라 부산포를 보다 △이바구길을 걷다 △국제시장을 기웃거리다 등 4개 주제로 구성됩니다.  이 가운데 ‘영도다리를 건너다’ 코스는 오전 11시 30분 남포동 부산종합관광안내소에 모여 투어를 갖고 있습니다. 영도다리 도개 관람~수리조선소길~봉래시장, 남항시장~부산어묵전시관까지 부산의 근대역사와 먹거리 체험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코스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부산시는 한국근대사와 민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국내 유일한 도개교로서 47년 만에 복원된 ‘영도대교 개통식’ 을 2013년 11월 27일 오후 2시 중구 남포동 자갈치 매립지에서 개최했습니다. 1966년 이후 도개기능을 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의 희망과 꿈의 장소이자 부산지역의 부족한 관광인프라 구축 및 지역 문화상품으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영도대교는 동양 최초이며 국내 유일의 도개(跳開橋)식 교량으로, 부산 중구와 영도를 잇는 연육교입니다.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한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의 다리로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구축의 일환으로 1934년 11월 23일 준공했습니다.
  영도대교 아래쪽에는 점집들이 즐비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얽힌 사연은 참 슬프고 아련합니다.  영도대교 완공된 후의 역사적 시기는 일제말기와 해방, 그리고 6.25가 이어집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서민들은 가난과 여러 고통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영도대교 올라가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고객으로 잡기 위해 점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많은 때는 이 좁은 골목에 75개 정도의 점집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중략~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질 때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노래 가사를 보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4후퇴를 하게되고 한미연합군은 고립되어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흥남철수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 당시 아군과 함께 10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배에 매달려  포항과 거제도로 옮겨오게 됩니다.  흥남항에서 일가친척들이 함께 오지 못하고 헤어지면서 꼭 부산가서 만나자며  살아서 '40계단'과 '영도다리'에서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생이별을 합니다. 이별의 약속이 흥남항만이 아닌 모든 피난 행열에서의 약속이었고 혹 영도다리와 40계단에 가면 일가친척이나 고향사람들의 안부를 듣는다던지 만날 수 있을까 싶어 피난민이 매일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특히 부산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한국전쟁의 이산과 실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자 문화재로, 최초 개통 시 하루 7번 도개했지만 당시 교통량 증가 등으로 1966년 9월 도개 중단 후 4개차로의 공용도로로 이용돼 왔습니다.
 롯데그룹의 영도대교 복원 총사업비 1,100여억 원 전액 투자 등 적극적인 지원으로 2011년 12월 기존 교량을 철거했으며, 2013년 11월 27일 신설된 영도대교 개통식을 거쳐 12월말 복원공사가 완료됐습니다. 준공 후에는 롯데그룹은 영도대교를 부산시로 기부체납했습니다. 영도대교의 총길이는 214.8m이며, 교량 폭은 당초 18.3m에서 25.3m로 4차로에서 6차로로 확장됐으며, 양측 보도 폭도 3m에 이르는 등 시민들의 보행환경개선과 영도대교의 극심한 교통체증이 대폭 완화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추억의 영도다리가 복원되어 2013년 11월 27일 개통식과 함께 매일 낮 12시부터 12시 15분까지 15분간 한 차례 상판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도개 속도는 1분30초~4분으로 도개 동력은 22마력입니다.
 바닷 바람이 매섭게 느껴집니다. 오고가는 작은 배들을 볼 수 있었고 영도와 자갈치 시장 등이 보입니다. 영도대교가 들리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다리 밑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부모님과 함께 관광을 온 아이도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40여 년 전에 다리가 들리는 것을 본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굉장히 많이 오셨습니다. 12시를 몇 분 남겨놓은 시각, 영도대교의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한국전쟁 때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며 국민가요로 대접받았던 현인 선생님의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노래였습니다. 2절에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가사로 영도대교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11시 57분이 되자 사이렌이 울리며 통제가 시작됩니다. 기다란 안전바가 내려가고 완벽한 통제를 위해 올라가 있던 철근이 내려와 앞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다시 흘러나오며 톱니바퀴가 돌아갑니다. 동시에 육중한 다리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올라가던 다리는 75도 각도가 되자 멈춰 섰습니다.  아스팔트에 그려진 갈매기도 하늘로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각자 그 순간을 추억하며 사진을 찍고 감상합니다. 5분 동안 서 있던 다리는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다리가 완전히 내려가고 통제가 풀리자 하나 둘 씩 돌아갔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이’란 노래가 흘러 나왔지만 지금은 고장난 듯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자살하기 위해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려 했던 흔적이 이 노래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부산과 오랜 세월 애환을 함께 해온 영도다리, 절절한 사 연만큼이나 늘 빛나는 희망의 부산의 댚ㅅ 상징물이길 기대합니다.   "지금, 부산 영도다리로 온나~" 우리 금순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저에게 반드시 연락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