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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전북 다리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익산의 요교비가 다리 관련, 전북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문에 ‘건륭 46년’으로 나와 신축 년도가 1781년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어 함열 마포교중수비는 1830년, 김제 금구향교 앞 학교중건비는 1833년, 전주 서천개교비는 1847년, 전주 남천교개건비는 1862년, 진안 백운 제룡교 시주비는 1869년, 완주의 유범수 건교 기공비는 196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새전북신문이 찾아낸 김제 '금산사 조교기념비 ’는 아직까지 건립 연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익산 시내에서 원광대를 지나 강경으로 통하는 국도23호를 따라 황등 쪽으로 가다보면 다리가 나오는데,  ‘허리다리(腰橋)’다. 이는 황등제 옛 터에서 자리한 요교비(腰橋碑)는 제방과 교량의 가설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덕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 황등제의 제방에 ‘허리다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1923년 이를 수축하면서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주 남천교개건비'는 1791년 만들어진 남천교의 개건 경위를 기록한 비석으로,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졌다가, 1862년(철종 13년)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개수내력과 공사에 힘쓴 자들의 명단이 기록됐고, 2면의 측면에는 건립 연대(동치 원년 임술; 1862)가 적혀 있고, 후면에는 돈을 낸 지방 군현별 액수의 명단과 건륭(乾隆;청 고종) 58년(1794년)의 명기(글귀)가 있다. 4면의 측면에는 다리 건립에 동원된 군인들의 총수와 동원된 지역명 등이 새겨져 있다.

전주의 서천교는 원래 흙다리(土橋)였지만 조선 순조대 관찰사 한용구, 조인영, 이규현 등의 노력과 성내 백성들의 성금을 모아 1833년 돌다리(石橋)를 놓았다. 탄탄하기란 마치 땅바닥을 딛는 것 같았으며 놓여진 돌들의 모습은 고기 비늘처럼 눈부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후 홍수로 붕괴되었으며 1845년에 전주부성 사람들을 동원 개축했다.

1896년에는 승지 김창석이 사재를 털어 개축했지만 오래되지 않아 무너졌다. 그후 1931년 박기순이 서천교 다리돌을 옮겨 완산에 청학루(靑鶴樓, 옛 국악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대신 목교(木橋)를 현 서천교가 있던 자리에 놓았으나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다.

 '전주 서천교개교비'는 1847년에 세워졌으며, 서천교의 건립 과정과 모금한 액수 등이 기재되어 있다. 건립을 위한 자금의 마련과정이 전면에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기금을 조성한 사람들의 명단과 액수가 기재되어 있다.
 김제  금구향교 앞 '학교(鶴橋, 학다리)중건비'는 1830년 무렵 당시의 금구현령이던 김○○(이름은 알려지지 않음)가 이 지방의 유지들과 함께 힘을 합해 낡아서 무너진 채 버려진 학다리를 다시 놓고 그 사실을 적은 것이다.  비에 새겨진 글을 통해 조선시대에 금구라는 작은 고을에서 다리 하나를 놓는데 어떠한 과정을 거쳤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그 비용을 마련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비 앞면이 너무 심하게 닳아 없어져서 놓은 과정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밝힐 수 없고, 학다리가 정확히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1700년 경에 편찬된 「금구읍지」에 있는 지도에는 이 다리가 동도면과 남면 사이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지도에 의하면 학다리는 남면이나 일북면 및 이북면에서 현의 치소(治所)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다리를 놓는 데에는 이 다리를 이용했을 위의 3개 면민들 뿐만 아니라 고을 안 모든 백성이 이에 참여했다. 이것은 아마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즉 「학교」 자리에 돌다리를 놓아야만 금구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세(地勢)를 누를 수 있고, 또 물이 바짝 마르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설(說)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소양초등학교 옆에 ‘국회의원유범수건교기공비’는 1969년 가을에 세워졌다. 당시 완주군 국회의원 유범수씨가 명덕리다리를 놓는데 공적이 있다고 해서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완주의 산정교도 유범수와 관련된  비문이 남아 있다. 새전북신문이 찾아낸 김제 ‘금산사조교기념비(金山寺造橋紀念碑)’는 비가 너무 낡아 한자로 쓰인 ‘만인교’란 글자 외엔 판독이 거의 불가능해 탁본(탑본) 등을 통해 추가 연구가 필요해보인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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