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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전주용머리고개,시로 보듬다

 

완산칠봉은 전주의 옛 지명인 '완산(完山)'의 유래가 된 영기가 어린 산으로 '시신을 거꾸로 묻어도 탈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당으로 알려진 지역의 명산입니다. 완산동은 완산칠봉 자락에 형성된 마을로,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으로 호남 최초의 교회인 '은송리 교회'가 세워져 개신교 전파의 산실입니다. 현재 완산동은 조선시대 부남면의 은송리, 곤지리와 부서면의 빙고리입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 일원을 병합해 완산칠봉에서 이름을 따 '완산정(完山町)'으로 부르며 전주면에 편입됐습니다. 광복 후 1946년 완산정을 완산동으로 고치고 동완산동, 서완산동, 중완산동 3개동으로 나누었다가 1957년 동완산동과 서완산동으로 개편됐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얼음을 떼어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있었으며,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용머리고개는 산세가 용의 머리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입니다. 이는 전주의 비상을 의미하는 형세로. 일본이 들어와 용머리를 절단하고 길을 내자 당시 지역토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용머리고개에는 대장간과 골동품점 등이 모여 있어 볼거리가 많으며, 현재 가장 오래된 대장간은 1956년에 문을 연 '광명대장간'입니다. 또 골동품가게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은 태평동에서 1982년에 용머리고개로 옮겨진 '광명당'이라고 합니다.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는 용머리고개는 전주 서남쪽에 있는 관문입니다. 항상 어둠의 끝에서 아침이 오듯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남부시장 사람들의 삶처럼. 이 때까지만 해도 김제나 정읍, 부안, 고창 등을 가려면 용머리고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꼬치산마을(따박골)은 6,25전쟁 후부터 점술가와 무속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시대 점술인들이 일반인들의 천대를 피해 전주성문(서문) 밖에 하나 둘씩 자리하면서 생기기 시작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용머리고개의 연대와 유래 등이 정확히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로, 선조들이 용머리 같다는 고개라 하여 龍頭峙(용두치, 용두현, 용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오면서, 용의 형상을 닮은 큰 인물의 출현을 바라고 또 바랬습니다. 국도 1호선인 경목선(서울-목포)이 지나는 곳으로 먼 옛날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구제날망 또는 제말랑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일제시대에는 완산교 다리를 건설해 용의 형태인 산능선을 도로로 개설, 용의 허리를 끊은 후로부터 용머리 고개라 불리어 왔다는 구전도 보입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청동기 사람들 부싯돌로 튀는 햇볕 몇 낱이 바삭거린다. /조선낫은 풀무질로 버얼겋게 익어가고 징소리 몇 줄기, 쇠붙이 여음이 잉걸불이 된다./산천초목의 귀를 깨우는 담근질 물과 불이 만나서 상생(相生)하며 날이 서는 명도(名刀) 불꽃으로 얼룩거리는 위험한 지각(知覺)의 빛을 털고 어둠을 베어내는 생애의 스스로 조선낫이 된다. 뜨겁던 가슴을 열고 나와 차거운 새벽이 된다'

소재호시인의 '용머리고개 대장간'에는 이곳의 역사가 잘 담겨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원평, 삼천을 거쳐 용머리고개를 지나 전주성에 들어 왔습니다. 이 때가 1894년 4월 27일(음력). 동학농민군에게 새벽은 승리의 여명과 함께 밝았습니다. 전주성이 내려다 보이는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들은 단숨에 성을 차지해버릴 기세였고, 이제 세상은 그들의 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군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차출되었고, 후임 감사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으며 남아 있는 관속들은 모두 농민군과 내통을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농민군이 서문 쪽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자, 감사 김문현은 포기할 수 없는 성 대신에, 성 밖의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불길은 농민군을 잠시 저지하는 대신, 관군의 발등을 찍었습니다. 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민심은,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더 큰 불길이 되었습니다. 정오 무렵, 땅을 갈아엎듯 터져오르는 대포 소리와 수천 발의 총성과 함께, 마침내 서문이 깨지고 남문이 열렸습니다. 전주성의 함락이었습니다. 무엇이 땅밖에 모르던 농민들에게 쟁기 대신에 창과 칼을 들게 했는지요, 들의 나락을 거두는 대신에 사람의 목을 거두게 했는지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이 고개를 넘지만 아무런 뜻을 모릅니다.

'백제 여인들이 전주천 시린 물을 퍼다가 / 싸움터에서 죽은 / 지아비의 피묻은 옷을 두들겨 패던 빨랫돌들이 / 이끼를 키우며 살고 있다. / 백제 유민들의 때묻은 이부자리를 모아다가 / 새 솜으로 타주던 솜틀집이 살고있다 / 대나무장대에다 찢어진 깃발을 매달아 놓고 / 견훤성 불귀의 원혼을 불러들이는 / 패망한 역사의 술사들이 살고있다 / 용머리고개에는 / 관군들의 대포와 머리를 쳐부수던 / 동학군들의 녹슨 곡갱이와 낫을 달궈 / 무지개 일렁이는 날을 놓아 / 비석거리의 반골을 불러모으는 / 대장간 풀무쟁이가 살고있다 / 용머리 고개에는 / 깨어진 용마루 기왓장마다 / 퉤 퉤 침을 뱉으며 / 싯퍼런 욕을 노비문서처럼 뿌리고 다니는 / 욕쟁이 할머니가 살고 있다'

정군수시인의 '용머리고개에는' 작품에도 등장합니다. 달구면 달굴수록 강해지는 무쇠같은 전주인들의 삶이 힘찬 망치칠과 담금질을 거쳐 언제, 어느 때 승천(昇天)하는 용으로 거듭날 것인가요?/이종근기자

 

용머리고개의 전설

 

용머리고개에 관한 얘기가 2가지 전하고 있습니다.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습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습니다. 이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沼)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습니다. 일수이신(一首二身)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 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습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恨)을 품고 용(龍)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 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京木線)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해서 용머리고개'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설도 있습니다. 강감찬장군이 이곳에 있을 때 어느 해 심하게 가물었습니다. 장군이 걱정을 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동이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 오라고 일러 보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는데 그를 보자 강감찬이 호령하되 "이렇게 가물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노라"하였더니 그 초립동은 실은 용이 둔갑한 것이었습니다. 용이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은 곳이 이 고개라고 해서 용머리고개로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