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천년고도 왕조문화의 뿌리를 간직한 도시다. 특히 한옥마을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도심속에 잘 보존된 약 700여 채의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전통생활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발상지, 즉 풍패지향(豊沛之鄕)이다. 때문에 조선은 건국직후 전주에 태조 어진(영정)을 모시고, 그 건물(眞殿, 전주 경기전 정전 보물 제1578호)을 새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런 터라는 뜻으로 ‘경기전(사적 제339호)’이라 이름했다.
경기전은 사자, 거북 등 아이콘이 의미하는 코드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를 영화처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숨은 문화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경기전 정문 밖 도로가에 있는 하마비이고, 또 하나는 진전의 거북이 이야기이다.
<하마비>
경기전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우선 하마비(조경묘에는 이와 다른 하마비가 있음)를 만나게 된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진 풍상에 닳은 비석. 그 앞에서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울러 경기전 내부로는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눈썰미가 제법 있는 사람이라면 하마비를 떠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또는 해태, 이하 같음)를 볼 수 있다.
경기전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고, 그래서 근처에 있던 향교까지도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화산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이 하마비,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뒷면에는 1614년 세웠다는 내용이 한 줄로 되어 있으며, 오른쪽 옆면에는 1856년 중각했다는 글귀가 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하마비는 좀처럼 보기 드물고, 또한 셈세하면서도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 조각품이란 생각이 든다.
왼쪽 사자(우리가 바라보아서 오른쪽)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에 비해, 그 옆의 우측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수놈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암놈이다.
발톱의 모양도 다르다. 입을 벌리고 있는 공격형의 수놈 사자는 발톱을 세우고 있고, 입을 다문 수비형의 암놈 사자는 안으로 오므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엉덩이의 크기는 암놈 사자가 수놈사자 훨씬 더 크다. 머리크기와 몸의 덩치는 엉덩이와 반대로, 수놈 사자가 더 크다. 눈매도 수놈 사자가 부리부리하니 공격적이다는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의 설명.
다시 말해, 두 마리의 사자는 암수 각 한 마리로 조선이 음양오행이라는 이원론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하마비의 동물상이 사자인지 아니면 해태상인지는 말이 구구해 정확치 않다.
해태상이 맞다면 경기전 앞산이 승암산, 즉 불을 머금은 화산(火山)이므로 그렇게 배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옛 사진을 보면 하마비의 방향이 본래는 지금과 달리 시내쪽을 향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이 또한 의문스럽다고 한다.
<홍살문>
경기전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높이 선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대개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넣었다.
홍살문에 단청의 오방색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이유는 태양을 숭배하던 의식에서 비롯했다. 태양의 색은 음양에 있어 양(陽)의 색인 붉은색이다. 붉은색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준다는 이유인데, 동짓날 팥죽을 끓여먹는 풍습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홍살문 가운데에는 삼지창이 만들어져 있는데 삼지창의 목 부분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삼지창 역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홍살문에 있는 붉은색과 태극 문양을 통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잘 순환하면 양의 기운이 충만해서 건강하고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넉넉하게 읽을 수 있다. 바로 이처럼 홍살문은 경기전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이라.
경기전의 감춰진 또 하나의 문화코드는 진전에 붙어 있는 거북이들이다. 정면 풍판에는 거북이를 상하로 조각해 조선이 천년만년 번성해서 백성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담지 않았나 싶다.>
<진전의 거북>
이전에는 태조 어진을 모셔놓은 진전(현재 모사본)이 있었는데, 그 중앙에 ‘정(丁)’자 형의 돌출된 배향공간이 있다. 진전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돌출된 지붕측면 널판지가 정면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나무로 된 조각품이 붙어 있다.
형상으로 보아 틀림없는 한 쌍의 거북이다. 한 마리는 목이 잘려나갔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목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거북은 모두가 알다시피 수명장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비석 받침돌도 거북이 형이다. 물론 불교에서 거북은 용궁 즉 부처의 세계 내지 그곳으로 안내하는 인도자이기도 하다.
어느 목공(木工)인가 경기전을 완성하고 그 영원함을 위해 지붕에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올려놓았던 것이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 건축인 점에서 특히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크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화마를 피해 진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염원의 발현은 아니었을까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경기전의 모란과 용 문양>
경기전 안으로 들어오면 연화(蓮花), 주화(朱花), 녹화(綠花)를 반복적으로 표현,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니 멀미가 날 지경으로 황홀하다.
이곳은 우선 모란을 사용해 왕과 관련된 건축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경기전의 모란은 외신문, 내신문, 익랑의 단청에서는 만날 수 없고, 본전의 월랑과 감실 외벽 화반에서 찾을 수 있다. 월랑의 것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함으로, 감실 외벽의 것은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는 ‘국화는 은둔의 꽃이고 모란은 부귀의 꽃이며 연꽃은 군자의 꽃’이라고 했다. 예부터 모란은 화왕(花王)이라 불리었다. 꽃 중의 왕이니, 꽃을 의인화한 이야기에 모란은 항상 왕으로 등장했다. 신라 신문왕 때 설총의 ‘화왕계’ 주인공인 화왕은 모란이다. 또한 화초와 초목을 신하와 백성으로 의인화한 임제의 ‘화사’에서도 모란은 하나라의 문왕으로 비유했다.
중국에서는 모란을 부귀를 상징하는 ‘부귀화’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부귀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란 그림을 많이 그렸다. 모란과 목련, 그리고 해당화가 함께 그려져 있으면 목련의 옥, 해당화의 당을 합쳐서 ‘부귀옥당’이라는 뜻이 된다. 즉 ‘귀댁에 부귀가 깃들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모란에 얽힌 이야기로는 신라시대 선덕여왕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실제 심어 본 결과 향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모란은 향기를 품고 있는 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혼례 때나 신방을 꾸밀 때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에는 시원스러운 모란무늬뿐만 아니라 추상화된 모란무늬가 나타나고 백자에서는 매우 사실적인 모란무늬가 항아리 등에 가득 시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종대왕태실비의 난간, 경기전 내부의 연꽃 조각과 외부의 연꽃 그림은 극락왕생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업장소멸을 위한 후손들의 바램을 그윽히 담은 것은 아닐까.
외신문 뒤쪽 창방에는 ‘목숨수(壽)’자를 시문해 기쁠 ‘희(喜)’자를 두 개 겹쳐 놓은 ‘쌍희(囍)’자를 대신하고 있다. 외신문과 내신문 안쪽을 보면 ‘만자만(卍)’자와 ‘버금아(亞)’자가 쌍으로 각각 세 곳에 시문됐으며, 진전 앞에는 태극문양도 숨은 코드의 하나다.
<태실의 용>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도 볼거리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이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모셔두는 곳을 이르는 것으로, 그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하다. 경기전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태실은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으로, 옆에 태실비가 함께 놓여 있다.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 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이 태실과 비는 왕실에서 태를 처리할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 어진>
최근에 국보로 지정된 태조어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1점 만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엔 조선태조 어진을 비롯, 영조어진(보물 제932호), 철종어진(보물 제1492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어진은 귀하신 몸이다.
조선시대의 어진은 궁중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다. 실례로 영조와 철종의 어진이 대표적이다. 익선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허리에 옥대를 찬 영조대왕의 어진은 국왕으로서의 기품과 당당함이 수염 하나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진은 궁중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다. 실례로, 영조대왕(1694년-1776년)공신을 녹훈할 때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가문에 내림으로써 대대손손 기억하게 하려 하였기에 많은 공신들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이곳의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 얼굴을 표현했다.
1872년(고종 9년)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은 모두 25점이나 그려졌는데, 면복본(冕服本), 정건본(幀巾本), 익선관본(翼善冠本), 곤복본(袞服本), 황룡포본(黃龍袍本), 입자본(笠子本), 마좌본(馬坐本) 등이다. 물론 모두 영전(影殿)이나 진전봉안용(進展奉安用)이다.
이들 태조어진은 문소전(文昭殿), 선원전(璿源殿),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영숭전(永崇殿), 목청전(穆淸殿), 영희전(永禧殿), 남별전(南別殿) 등에 봉안됐으며, 태조어진 봉안에 참여한 화가를 보면 윤상익, 조세걸, 이재관, 조중묵, 조석진, 채용신 등이 있다. 조선 태조어진은 1872년에 조중묵이 모사한 익선관본이자 현재 유일의 태조어진으로, 바로 인근의 어진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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