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윤명로: 정신의 흔적》전 개최
● 한국 현대추상회화의 원로 작가 윤명로의 50년 화업 총망라
● 자연과의 깊은 교감으로 완성한 독창적인 추상 미술의 정수를 제시
● 1963년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 <회화 M.10>, 가로 13m에 이르는 <익명의 땅 91630>, 처음 공개되는 <高原에서 MXII-0103>까지 각 시기별 대표 작품 출품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은 한국 현대추상회화의 대표적인 원로 작가인 윤명로(尹明老, 1936~)의 50년 화업을 총망라하는《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을 2013년 3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 과천 본관 제2전시실 및 중앙 홀에서 개최한다. 각 시대별 대표 작품과 함께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대형 회화 신작 등 총 60여 점이 공개된다.
《윤명로: 정신의 흔적》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정립하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준비된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 회고전’ 시리즈의 일환이다. 본 전시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50여년의 화업을 통해 독창적인 추상 회화를 선보였던 윤명로의 시대별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는 식지 않는 뜨거운 창작열로 완성한 대형 회화 신작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윤명로는 1960년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며, 덕수궁 담벼락에서의 획기적인 전시를 주도했던 ‘60년 미술가협회’의 창립멤버였다. 이후 창조적 도전과 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윤명로는 1960년대부터 척박했던 한국현대판화의 태동과 위상 정립을 위해 헌신했던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원로작가다. 또한 지난 30년간(1972~2002)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배 작가들을 양성한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윤명로의 작품 세계는 크게 10년을 주기로 변화의 주기를 거친다. 1960년대 격정적인 앵포르멜 추상회화 시기를 거쳐, 인간과 사회구조의 붕괴와 혼동을 갈라짐과 터짐의 물리적인 현상을 통해 은유했던 1970년대 <균열> 연작을 통해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찾기 위한 치열한 형식 실험기를 거친다. 1980년대 <얼레짓>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사물과 행위를 결합시킨 단어를 화두로 자유로운 신체의 표현력을 회복시킨 경쾌한 느낌의 추상회화를 통해 전통적인 미감의 현대적 표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윤명로는 <익명의 땅> 연작을 통해 거대한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자신의 몸을 도구삼아 거대한 화폭에 분출시키며 드라마틱한 추상표현 회화를 선보였다. 거칠게 몰아치던 폭풍이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오듯, 2000년대의 <겸재예찬> 연작은 작가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를 인식하고 깊은 교감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와 명상, 운필의 충만한 기운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흐름은 현재의 완숙한 추상회화까지 연결되고 있다.
전시장은 1960년대부터 2012년 신작까지 50여년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10년 주기의 시기별로 섹션이 구분된다. 각 시기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미술사가, 평론가 인터뷰, 작가의 역사적인 사진자료 등을 보여주는 3편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상영되어 윤명로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도울 예정이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2012년 신작들로 특별하게 꾸며진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 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자연광만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윤명로의 완숙한 추상 회화작품과 함께 시공을 초월한 명상과 쉼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꾸며진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정과 굳은 의지, 이를 뒷받침하는 부지런함을 통해 독자적인 추상 회화의 세계를 완성해나가는 작가 정신은 후세대 작가들의 귀감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조망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사의 층위를 더욱 두텁고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예정이다.
한편, 전시기간 동안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갤러리 토크,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문가 대담회, 어린이 및 청소년대상 감상교육 등 다양한 교육?문화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초등학생 및 중, 고등학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 감상교육을 2013년 4월~6월 중 실시하며, 어린이와 청소년 관람객을 위한 감상 가이드북도 제공될 예정이다. 교육?문화행사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온라인 예약을 통해 사전 참여 신청이 가능하며,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oc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시기별 작품 소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대가들의 작품을 조망하는 대형 회고전을 꾸준히 개최해왔다.《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은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50여년의 화업을 통해 독창적인 표현의 추상회화를 개척한 윤명로(尹明老, 1936~)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이다.
윤명로는 1960년대 격정적인 앵포르멜 추상회화 연작과 인간과 사회구조의 붕괴와 혼동을 갈라짐과 터짐의 물리적인 현상으로 표현했던 1970년대의 <균열> 연작을 통해 독자적인 표현을 찾기 위한 치열한 형식 실험기를 거친다. 1980년대 <얼레짓>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사물과 행위를 결합시킨 단어를 통해 전통적인 미감의 현대적 표현 가능성을 탐구하였으며, 1990년대 <익명의 땅> 연작에서는 거대한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거대한 화폭에 분출시키며 드라마틱한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2000년대에 선보인 <겸재예찬> 연작은 작가를 둘러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와 명상, 운필(運筆)의 충만한 기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무위(無爲)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현재의 완숙한 추상회화까지 연결되고 있다.
윤명로는 육체와 정신의 깊은 곳에 켜켜이 각인된 사유의 흔적들을 외부로 발화(發花)시키며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탄생과 성장, 격정과 분출, 성숙과 관조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끝없는 열정과 굳은 의지, 이를 뒷받침하는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변화의 열망을 창작의 에너지 삼아 자신을 담금질하며 독자적인 추상 회화의 세계를 구축한 오롯한 작가 정신의 증거물이다.
1960년대
1960년대 윤명로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한국미술계를 휩쓸었던 앵포르멜 추상회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의 소설 『벽』을 모티브로 제작한 <벽A>(1959), 파리 청년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1963), 절규하는 사람 형상의 <문신 64-1> 등은 어두운 색채와 재료의 물질감이 두드러지는 초기 대표작들이다. 그의 초기작업은 <원죄>, <석기시대>, <문신> 등의 제목을 지니고 있다. 이는 기존의 질서나 양식에 대한 부정, 알 수 없는 미답의 세계, 주술적이고 원생적인 뿌리에 대한 동경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윤명로는 음울하고 피폐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치열하게 고뇌하며, 앵포르멜 추상회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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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화M.10, 1963, Silver painting, plaster and oil on linen, 162x132cm, Leeum,Samsung Museum of Art
2. 문신 64-1_1964_Oil and plaster on linen_116.5x91cm_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3. 원죄B_1961_Copper pllate and oil on panel_91.5x122cm_Courtesy of the artist
1970년대
<자>와 <균열> 연작은 1960년대에 시도했던 표현적인 추상회화의 격렬한 감정적 제스처가 가라앉고 엄격한 화면구성과 옅은 청회색과 흰색 등 단색조의 기하학적 형태감을 드러낸다. 윤명로는 ‘자’가 세상의 규범과 질서를 상징하며, 규범과 질서가 붕괴되는 현실적 상황을 녹아내리고 부서지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후 작가는 <자> 연작의 제작 과정에서 나타난 화학적이며 물리적인 균열 현상을 이용하여 비의도적이며 우연적인 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균열> 연작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우연성과 비의도성에 숨겨진 작가의 치밀한 구성 의도를 보여준다. 작품의 표면을 가득 채운 물리적인 ‘균열’ 현상은 작가의 세심한 의도 하에 배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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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 V-VXVII_1974_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_130x130cm_Courtesy of the artist
2. 균열 77-710, 1977, 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_120x135.5cm, Courtesy of the artist
1980년대
1980년대 작가는 <얼레짓> 연작을 발표하였다. ‘얼레짓’은 연실을 감는 ‘얼레’와 ‘얼레빗’ 그리고 행위 명사 ‘짓’을 합성한 단어이다. <얼레짓> 연작은 70년대 <균열> 연작에서 강조되던 물질적인 현상의 우연성과 대비되는 신체의 반복에 의한 적극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과 먹을 이용하여 촘촘한 빗질 같은 선으로 면을 구축하듯 쌓아올리며 전면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반복적인 붓질은 여러 겹의 층을 형성하며, 꽉 짜인 그물망 같이 얽히고설킨 단단한 표면을 구축한다. 80년대 중반 이후의 <얼레짓> 연작은 마치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를 연상시키는 듯한 비워진 공간의 구성과 무심한 듯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자유로운 선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기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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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4-425_1984_Acrylic and india ink on cotton_83x130cm, Courtesy of the artist
2. 얼레짓 85515_1985, Acrylic, india ink on cotton_ 181x222cm, Courtesy of the artist
3. 얼레짓 86-625_1986, Acrylic and india ink on cotton_160x227cm,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1990년대
윤명로는 1990년 충북 부강의 대형 창고에서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다. 거대한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느꼈던 경외감을 작가는 커다란 화폭을 대지 삼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이는 마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격렬한 표현욕구가 원시 자연의 기운을 통해 거대한 캔버스 위에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 듯 보였다. 작가는 미지의 대지에 뛰어든 탐험가처럼 거대한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원시 자연의 광폭한 생명력을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그가 표현해 낸 ‘익명의 땅’은 태초의 대지가 꿈틀거리며 만들어 낸 거대한 산맥의 단단한 뼈대를 역동적으로 솟구치며 포말을 일으키는 생명의 파도의 기운을 담고 있다.
익명의 땅 91630, 1991, Oil and acrylic on cotton, 248.5x333x(4)cm,_Courtesy of the artist
2000년대, 그 이후
2000년대에 선보인 <겸재예찬>은 <익명의 땅> 연작이 보여주던 격렬한 에너지가 가라앉고 보다 여유로워진 듯 관조적이며, 명상적인 추상회화를 보여준다. 작가는 리넨이나 면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후, 바인더에 갠 고운 쇳가루를 붓과 나이프, 그리고 이를 닦아내는 헝겊으로 이미지를 그려나간다. 짙은 회색의 철가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기와 반응하며 산화되면서 미묘한 색채의 변화를 일으킨다. 윤명로는 <겸재예찬> 연작 이후 ‘조망’, ‘숨결’, ‘바람 부는 날’, ‘겨울에서 봄으로’, ‘고원에서’ 등 자연의 고유한 특성과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추상 회화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윤명로의 최근작들은 의도적인 표현을 뛰어 넘어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 듯한 완숙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고원에서 MXII-0103, 2012, Acrylic, iridescence on linen, 228x333x(2)cm, Courtesy of the artist
■ 작가 노트
내가 태어났을 때는 나라가 없었다. 성도 이름도 일본어로 바뀌었다. 내 이름을 되찾았을 때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다. 이념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왔을 때는 초등학교 3학년 이었다. 그때 나는 환경미화를 위한 성인들의 초상화를 모사해서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의 기억들이 내가 지금도 여백 앞에서 사유하고 고뇌하는 빌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족상쟁의 비극적인 잔해가 아직도 흰 눈으로 덮여 있던 무렵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미술대학에 입학 한다. 실존주의가 썰물처럼 대학가를 휩쓸고 지나갔다. 졸업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국전에서 '벽 B' 로 특선을 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소설, '벽'에 등장하는 사형수가 주인공 이다. 절망과 부조리의 극한 상황을 휴먼이즘이라 했다. 그때 국전은 화가 지망생들에게는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나는 등용문을 걷어차고 동료들과 함께 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주한영국대사관으로 통하는 덕수궁 담에서 반 국전 선언을 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거칠고 난삽했다. 원죄, 문신, 석기시대 따위와 같은 작품들과 함께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1969년,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닐 암스트롱(Neil A. Armstrong)이 인류 최초로 달에 남긴 발자국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가 실존주의를 해체하고 있었다. 뉴욕의 마천루와 지하철이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조국은 나를 불렀다. 이른바 해외에 흩어져 있었던 병역미필자들을 잡아 드려 평등사회를 이룩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나는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해병대를 지원 했다. 그러나 폐결핵의 흔적 때문에 미취학자들과 함께 병종으로 분류 되어 조국을 위한 의무로부터 분리 된 몸이었다. 이시기에 나는 자(Ruler)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한다. 자는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고 규범이다. 그런데 세계는 룰러=통치자들에 의해서 규범이나 약속이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짐짓 갈라지고 녹아내린 자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망 한다. 병영에 갇혀 극한 상황에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자유, 그런데 그림은 주제가 관념적이고 사변적일 때 훈장을 단 병사처럼 보였다. 자의 형태는 사라지고 우연성과 부조리의 경계에서 균열만을 남겼다. 갈라지고 터진 흔적들은 의미 없는 추상이 되었다.
이후 나는 화폭 위에 무작위로 선을 그어대며 그 흔적들을 얼레짓이라 불렀다. 얼레를 감고 푸는 짓거리처럼 마음을 감고 푸는 몸짓의 흔적들로 비우고 채워 나갔다.
1991년 개인전을 앞두고 부강에서 토끼를 사육했던 텅 빈 창고 하나를 빌렸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높고 넓은 사육장이었다. 가없는 대지나 바닷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익명의 땅'이라 불렀다. 자아가 통제 받지 않는 익명성, 얼마나 자유로운가. 가없는 화폭 안에서 나는 모처럼 무한을 숨쉬고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뒤늦게 평면성을 회화의 본질이라 했지만 일직이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다. 그러나 나는 평면 속에서 공간의 깊이를 보았다. 259x 1,333cm가 되는 <익명의 땅 91630>은 이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02년, 정년으로 교육현장을 떠나자 갑자기 우리 것이 보였다. '여보게 우리 것을 세계화 하려면 지역성이 보편성을 띠어야 하네.' 세계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고독한 삶을 마감하셨던 수화 김환기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미래의 기억들을 위해 늘 열려 진 상태로 자리 잡고 있는 표상들 가운데서 겸재의 '인왕재색도'와 능호관의 '설송도', 추사의 '세한도'를 좋아한다. '겸재예찬' 연작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분별없이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화두였다.
나는 회사후소에 갇혀 수세기 동안 관념 산수를 답습했던 화론들을 해체하고 싶었다. 안료나 수묵 대신에 철분을 사용했다. 쇳가루는 안료가 아니라 입자여서 개칠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뒤따랐다. 철분은 습도에 쉽게 녹슬어 버리는 단점도 있었다. 쇳가루가 공기를 갉아 먹으며 서서히 철화백자처럼 환원 되었다.
2010년 베이징에 있는 중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나는 쇳가루와 함께 훈색 (暈色)을 사용했다. 철분의 불안정성과 긴장감 때문에 고민하다가 훈색과 마주쳤다.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이는 훈색의 변화는 많은 관람객들의 다양한 시각을 견인했다. 만약 아크릴릭 칼라가 없었더라면 팝아트나 옵아트의 탄생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또한 픽셀(pixels)의 진화가 없었으면 수묵이나 오방색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화두를 바꿀 때 마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탐색을 버리지 않았다.
내 그림은 랜덤(random)이다. 랜덤이란 더 내면적인 공간으로 접근하려는 숨결이다. 마음대로 형성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 끝에 나타나는 정신의 흔적들이다. 내 그림에는 아크릴릭이나 픽셀의 아름다움이란 없다. 그림이 아크릴릭이나 픽셀이 아닌 이유가 그림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모방을 허락 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들이다. 피카소는 일직히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분명 예술은 모방이 끝날 때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 주요 평론가, 작가어록
“…때 묻은 고무신짝에 막걸리를 돌리며 세잔과 보들레르를 사랑했다. 키에르 케고르, 니체, 사르트르를 스승처럼 모셨다. ‘자라투스트라는 죽었다.’고 낙산 위에 걸린 초승달을 보고 외쳐대곤 했다….”
윤명로(작가)
“내 그림은 랜덤이다. 랜덤이란 더 내면적인 공간으로 접근하려는 숨결이다. 마음대로 형성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 끝에 나타나는 정신의 흔적들이다.”
윤명로(작가)
“예술가란 모방을 허락 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들이다.”
윤명로(작가)
“윤명로의 <회화 M.10>은 앵포르멜 회화이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도 화풍에 있어서나 작업에 있어 매우 특이한 것으로 보였다. 마티에르는 은박이 얹힌 점토 같기도 했고, 그 찐득찐득한 마티에르 위를 손가락이 자유롭게 노닐며 환상적인 그 어떤 형상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이일(1932~1997, 미술평론가)
"<익명의 땅> 연작은 접신의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굿판을 벌이는 무당의 엑스타시와 같은 황홀감을 주는가 하면 절대 무화(無化)의 침묵공간을 연출해 놓기도 한다. 바다와 광란과 해일, 땅에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자연의 현상을 인간적 감성으로 투입하여 유기체적 반작용을 지속하는 듯 한 역학구조를 보여 준다."
김병종(작가, 서울대학교 교수)
“윤명로의 예술적 진보의 단계는 뚜렷하다. 구조적 추상에서 매개적 추상, 더 나아가 사의(写意)적 추상으로 발전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문인의 추상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가 끊임없이 대상을 정제하는 과정이고, 더 높은 경지의 정신과 이념에 다가서려는 과정이다.”
판디안(중국국립미술관장)
“윤명로의 예술은 비록 소리는 없지만 강한 음악성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회화에서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이러한 침묵의 힘은 온전히 그림에 자연의 리듬을 불러일으키면서 음악적인 신비와 만난다.”
도미니크 샤토(파리1대학 교수)
■ 작가연보
윤명로(尹明老)
1936년 정읍 생
1970 |
뉴욕 프래트 그래픽센터 판화 전공 |
1960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경력
현재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
장욱진미술재단 이사 |
2009-2007 |
제1,2회 관란국제판화비엔날레 심사위원, 중국 |
2003 |
재단법인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2003-1999 |
광주비엔날레 이사 |
2002-1972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
1996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
1993 |
도쿄 마찌다국제판화비엔날레 심사위원, 일본 |
1990-1980 |
공간사 주최 국제소형판화비엔날레 창립 운영위원 |
1987 |
제3회 중화민국국제판화비엔날레 심사위원, 중국 |
1973-1971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강사 |
1970 |
동아일보 주최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창립 실행위원 |
1970-1969 |
미국 록펠러3세재단 펠로우쉽 |
1968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출강 |
1968-61 |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 |
1960 |
60년 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덕수궁 담벽에서 창립전 개최 |
개인전
2013 |
윤명로: 정신의 흔적,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2011 |
신세계갤러리, 서울 |
2010 |
중국미술관, 베이징, 중국 |
2009 |
가나아트갤러리, 부산 |
|
갤러리 송하우스, 부산 |
2008 |
장흥 아트파크 블루스페이스, 장흥 |
2007 |
표갤러리, 서울 |
2006 |
동산방화랑, 서울 |
2005 |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04 |
신세계갤러리, 광주 |
|
현대예술관갤러리, 울산 |
2003 |
갤러리신라, 대구 |
2002 |
갤러리가나보브루, 파리, 프랑스 |
2001 |
조현화랑, 부산 |
2000 |
가나아트센터, 서울 |
1995 |
갤러리박, 서울 |
1992 |
선재현대미술관, 경주 |
1991 |
호암갤러리, 서울 |
1988 |
두손갤러리, 서울 |
1984 |
아트코아갤러리, 로스엔젤레스, 미국 |
|
동산방화랑, 서울 |
1977 |
견지화랑, 서울 |
수상
2009 |
대한민국보관 문화훈장 |
2006 |
대한민국문화예술상 |
2002 |
옥조근정훈상 |
|
가와기다린메이 평론가상, 일본 |
1990 |
제7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
1959 |
제8회 국전 특선 |
주한프랑스대사관, 세라믹 벽화, 서울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헤닝현대미술관, 헤닝, 덴마크 |
신시네티미술관, 오하이오, 미국 |
리움삼성미술관, 서울 |
대영박물관, 런던, 영국 |
로얄미술아카데미, 카트만두, 네팔 |
국립미술센터, 카이로, 이집트 |
중국미술관, 베이징, 중국 |
선재현대미술관, 경주 |
워커힐미술관, 서울 |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
연세대학교미술관, 서울 |
홍익대학교미술관, 서울 |
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 |
도쿄예술대학, 도쿄, 일본 |
일신문화재단, 서울 |
한국은행, 서울 |
대법원, 서울 |
한국통신공사, 서울 |
전북도립미술관, 전북 |
대한민국예술원미술관, 서울 |
주미한국대사관, 워싱턴, 미국 |
주중한국대사관, 베이징, 중국 |
타이페이국립국부기념관, 타이페이, 타이완 |
타이난기미미술관, 타이완 |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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