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다리

<8> 다가교

 

불과 수십년전만 하더라도 전주천 냇물의 양편에 반듯한 돌들을 배열해 놓고 여기에 여인들이 앉아 맑은물에 빨래를 씻으며 방망이질을 하던 풍경이 있었다. 김정숙씨의 ‘다가교 밑 빨래하는 아낙네 사진(1983년), 어찌보면 여인들이 빨래를 하면서 서로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방망이질로 풀기도 했을 터이다.

바로 이러한 대규모 빨래집단이 모여들자 매곡교(지금의 남부시장다리)부근과 다가교 부근에는 전문적으로 빨래를 쌂아주는 업종이 생겨 톡톡히 재미를 봤다.

특히 다가교 부근에는 집단 빨래터를 만들어 여기에서 빨래를 하는가 하면 그 빨래를 햇볕에 말리는 빨랫줄이 마치 차일을 친것 같아 장관을 이뤘다. 그런데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이런 풍경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다가교 바로 밑에 빨래터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까닭이다.

 

조선시대 전주에서 한양 방면으로 가려면, 전주부성의 서문을 나와 전주천이 흐르는 방향과 평행하게 난 길을 따라 장재뜰, 용산평, 사평뜰, 가르내뜰을 지나 추천교를 넘어 삼례 방면으로 가야했다. 장재뜰과 용산평 사이에는 숲정이, 용산평과 사평뜰 사이에는 떡점, 사평뜰과 가르내 사이에는 아랫가르내, 웃가르내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다.

전주천변 너머 부성 맞은 편으로는 유연대, 서살미, 청수코테기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인, 도토릿골, 어은골, 재뜸, 파구멀 등이 전주천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때문에 다가교 다음부터 이어지는 전주천의 다리들, 도토릿골교, 어은교, 서신교, 추천교 등에 담긴 전주 외곽 지역의 삶과 그 자취는 바로 이러한 자연적 배경을 토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지도를 보면 완산교를 지나 서문 근처에 사마교(司馬橋)가 보인다. 지금의 다가교에 해당하는 다리지만, 실제 위치는 지금의 다가교 위쪽이다.

옛날에는 이 다리를 건너 다가정, 사직단, 향교의 사마재 등이 있었으며, 고개를 넘으면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마교란 이름은 신흥학교 자리에 향교, 사마재 등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조선전기 향교의 글 읽는 소리가 진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어진의 심기를 건드린다고 해서 선너머로 이전했었는데, 향교를 왕래하는 학동들이 건너는 다리였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를 했던 학동들이 대개는 생원 진사를 뽑는 사마시험을 준비했다.

사마교를 건너 왕래하던 학생들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큰물이 지면 향교에 갈 수 없었고, 종종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었다고 전한다는 홍성덕 전주대학교 교수의 설명.

사실 1920년대까지도 전주에 맹호가 출몰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보다 수백이전에 다가산이 있은 유연대 자락은 울창한 숲이 있었고 맹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와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도시계획이념이 적용되어 임진왜란 직후 향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사마교의 의미는 다리만 남겨 놓은 채 사라져 갔다

일제시대에 이 다리는 대궁교(大宮橋)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전주의 대표적인 사정(활터)인 천양정이 있어 사정다리라고도 했다고 한다. 고지도에 징검다리로 그려져 있고, 삼하교(三河橋)라고 쓰여 있다. 사마교 건너 좌편 다가산 아래 다가정과 천양정이 있다.

옛 사람들의 기억을 빌리지 않더라도 전주천에서 풍광이 좋은 곳이라면 한벽당이 으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가교였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젊은 청춘 남녀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였던 다가산을 이어주는 다가교는 그러나 씁씁했던 우리 역사의 아픔을 담고 있기도 하다.

1914년 전주신사가 완공된 뒤 사마교는 신사를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참배 통로였다. 이런 다리가 1920년 홍수로 유실되어 버리자 박기순이 1만원을 기부하여 철근콘크리트 교각에 나무 상판을 얹은 다리가 새로 놓였다. 나무 상판을 얹은 이 다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1935년 4월 1만원의 돈을 들여 6월 새로운 콘크리트 다리를 세웠다. 총길이 58미터, 폭 7미터의 크기로 교각은 물론 상판까지 철근 콘크리트로 세운 다리였다. 전주에서는 전주교(싸전다리), 완산교에 이은 세 번째 콘크리트 다리다. 다리 위는 아스팔트로 포장하고 각 기둥에는 보주를 얹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시에 이 다리의 이름은 ‘대궁교(大宮橋)’였다. 전주시민들이 일제시대 다가교를 대궁교(大宮橋)라 부른 것도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신사가 세워진 곳이 다가산의 정상이고, 그곳에 오르는 길은 ‘참궁로(參宮路)’라 해서 잘 닦아 놓은 것이다. 다리의 교각이 ‘H’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리에 맞닿은 부분만 제방이 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36년 8월 대홍수로 이 다리의 1/3이 유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다가교를 대폭 강화했다. 이 위치보다 약 20미터 상류로 옮겨(현 다가교 위치) 1937년 3월에 총 길이 75미터, 폭 7미터, 공사비 2만2,360원을 투자해 8월에 완공했다. 1937년 다가교 부근에는 지금의 한강 유원지처럼 보트장도 만들었다고도. 다가교는 이어 1981년 2월부터 9월까지 확장을 확장했다. 시공청은 전주시청, 시공자는 광진건설주식회사가 맡았다.

콘크리트 다리로 바뀐 다가교는 강제로 전주신사에 참배를 해야 했던 전주사람들에게 치욕의 다리이기도 했지만, 선너머 아래 자리잡은 신흥학교나 기전학교 학생들에게는 다리 건너 서문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신앙의 다리였다. 오늘날 두 다리를 건너오고 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상반된 이런 의미야 말로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생생히 말해 줄 수 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역사도 남아있다.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은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는 동학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전라도의 수부이며 조선왕조의 풍패지향인 전주를 농민군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홍계훈의 경군과 농민군은 이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완산전투라고 한다. 전주성을 배경으로 한 농민군과 경군의 최대의 격전은 5월 3일에 벌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아침 10시경부터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현 다가교 자리)와 부근의 하류를 건너 유연대를 공격했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 부근의 경군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농민군은 이를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경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현재 다가교 주변엔, 가는털비름, 가죽나무, 갓, 강아지풀, 금강아지풀, 개똥쑥개망초, 갯버들, 검정말, 광대나물, 괭이밥, 고마리 기생초, 깨풀, 노랑꽃창포, 느티나무, 능수버들, 다닥냉이, 달맞이꽃, 닭의 장풀, 환삼덩굴 등이 자랄 정도로 깨끗해졌다. 사마교를 지나면 도토리골 앞으로 나무다리가 나온다. 사직단 북쪽 도토리골 천변에 종이를 만드는 외지소(外紙所)가 있는데, 바로 그 앞이지만 다리 명칭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도토리골 다리에 해당하는 나무다리이다.

'한국의 다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어은골과 쌍다리  (0) 2012.09.11
<9>도토릿골교와진북교  (0) 2012.08.29
<7> 완산교  (0) 2012.08.15
<6> 서천교  (0) 2012.08.02
<5>매곡교  (0) 201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