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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7> 완산교

 

 

                                                                                       <윤철규의 완산다리>

 

1967년 사진 한 장이 유독 눈길을 끈다. 이는 완산교의 모습의 하나로, 상여 행렬 뒤로 버스가 따라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는 풍경이다. 물론 지금은 상여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서 2008년, 김학곤화백이 수묵담채로 그린 ‘전주 천변’이란 작품에 상여가 등장하지 않는다. 시나브로 완산교 다리 밑에 백로가 날아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버스가 완산교 위를 오가는 모습은 그대로여서 실경산수로 표현된다.

 

전주부성이 등장하는 고지도를 보면 서천교를 지나서 다가산 못미쳐 나무다리가 하나 더 있다.

이 다리가 지금의 완산교에 해당된다. 곤지봉과 마주보고 있는 완산교는 ‘소금전다리’라고 불렀고, 곤지봉 아래 초록바위 근처의 천변 일대를 가리켜 ‘나무전거리’로 불렀다.

그렇다. 완산교는 소금전이 있어 소금전다리 혹은 염전교라고 했다. 완산다리에서 서천교 가는 전주 천변에 전주의 기록 문화를 대변하는 다가서포, 서계서포 등의 책방도 있었다.

1922년 전주교와 함께 콘크리트로 완산교가 놓여져 용머리고개를 넘어 정읍방면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어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완공하고, 197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재시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천은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홍수를 방비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제방 공사가 있었다. 호남읍지에 의하면 1509년 6,000척에 달하는 제방을 수축했다고 하며, 1731년에는 전주부윤 이수항이 승군을 동원해 전주천의 제방을, 1784년에는 관찰사 조시위가 대규모로 제방을 각각 수축한다.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을 실시하기도. 수 차례의 제방 공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강점된 즈음 전주 사진을 보면 제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920년 대홍수로 13명이 사망하고 546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1932년 완산교에서 상류쪽으로 339미터의 제방을 준공하였고, 1933년에는 전주교 하류 좌우 제방 576미터를 시공해 쌓았다. 이듬해 다시 400미터를 확장하고 1936년까지 668미터를 추가로 완공할 계획이었지만 1936년 대홍수를 만나 쌓아놓은 제방마저 대부분 유실되었다.

1936년 대홍수 때는 4시간 동안 무려 188mm를 퍼붓는 강우로 인해 전주교(싸전다리)를 제외한 완산교 등 거의 대부분의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1937년 총 32만2,800여원을 들여 좌우 제방 총연장 8,400미터를 축조한 가운데 다가교 아래는 보트장을 시설하기도 했다. 이때 쌓은 제방은 폭을 90미터로 넓히고 높이 역시 1미터를 올려 하상과 6미터의 높이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전주부성에서 김제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완산교와 용머리고개를 지나야만 한다. 완산동 용머리 고개는 서완산동 남쪽에서 김제, 금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용머리고개는 이름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용머리고개에는 몇몇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고개에서 유연대를 지나 어은골 산에 이르는 산의 모양이 용의 모양과 흡사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완산교와 용머리고개 사이 서쪽 산 다가공원 아래 방향으로 자리 잡은 동네도 서완산동에 포함된다. 이 동네는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었다고 해 빙고리(氷庫里)라 불리워졌다.

그러나 지금 이곳 사람들은 빙고리나, 군자정 등의 지명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서완산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전주의 도심 확장 과정에서 이전의 마을 이름은 이미 사라진 셈이다.

빙고의 위치는 구 예수병원 아래이었다고 한다. 토박이 화자들은 이곳을 빙고장이라 불리웠으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파 놓은 굴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 빙고는 소금전다리, 싸전다리 등의 상인들에게 전해졌을 터이지만, 요즘같은 염천의 더위에 전주시민들에게 제공됐을 터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완산교 인근 천변에는 가설극장이 자주 등장했다. 그 곳에서는 약을 팔기도 했지만 국악공연이 곁들여졌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땡땡이치더라도 자주 그곳을 찾았다고. 그때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면서 추임새를 넣을 수 있었고 풍물굿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디 그뿐인가. 대금소리에 울먹이고 가야금소리에 기쁨을 느꼈다. 또, 심심찮게 연극공연도 있었다. 신파극 아니면 국극이었지만 웃고 울었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중간 막을 닫고 약을 팔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번데기 장수, 우뭇가시 장수, 개떡 장수, 풀떼기 장수 등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최근 들어 고급 요리로 내세우는 녹두부침은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으며, 가볍게 사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사람이 흐느적거려도 요즘 말로 소매치기는 단 한명도 없었던 시절이었다는 송영상씨의 기록이다.

완산교와 용머리고개 사이에 지금도 남아있는 대장간, 가마솥 가게 등은, 용머리고개 너머로 펼쳐지는 농토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소통 공간으로서, 그리고 한때 번창했던 완산동과 전주시장의 영화를 보여주는 상징물로서도 그 가치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완산교를 지나 서문 근처에 사마교가 보인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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