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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6> 서천교

 

조선시대 전주천에는 어떤 다리들이 있었을까? ‘완산지’에는 전주부성의 3대 다리인 남천교, 서천교, 추천교만이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흔히들 전주부성에 남천교와 서천교를 비롯해 싸전다리, 쇠전다리(연죽교), 소금전다리, 사마교 등 여섯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추천교를 합하면 일곱 개인 셈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전주 옛지도를 통해, 슬치에서 발원한 전주천을 따라 전주에 들어오다 보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한벽당 부근의 징검다리다. 전주천이 한벽당에서 우회하여 얼마 안간 위치로, 이를 지나면 그 유명한 남천교가 나온다.

매곡교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서천교가 있다. 고지도에 나무다리로 그려져 있고 서천교라고 명기되어 있다.

서천교로 이름한 것은 이 천을 서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전주천이 완산교를 지나면서 북향하여 전주성의 서쪽을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현 서천교 서편에 1847년(헌종 13)에 세운 서천교 개건비가 있다. 개건시 황방산의 돌로 석교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도상에는 나무다리로 나타나 있다.

남천교가 남원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라면 정읍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은 서천교였다. 현재 완산교가 용머리고개를 넘는 국도상에 있었지만 예전에는 완산교자리에 서천교가 놓여져 있었다고.

개건 이전의 서천교는 나무와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하지만 서천교는 한양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경목선의 중요한 다리인데도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어 여름과 가을의 장마철이 되어 큰 물이 흐를 때마다 무너져 내리곤 해서 원근의 행인들이 건너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순조대 관찰사 한용구, 조인영, 이규현 등의 노력과 성내 백성들의 성금을 모아 1833년 돌다리(石橋)를 놓았다. 이때 세워진 서천교 이름이 서천평교(西川平橋)였으며, 19개의 수구가 나있는 석교로, 남원의 오작교형의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 졌을 것이란 자료도 보인다.

당시 서천교는 탄탄하기란 마치 땅바닥을 딛는 것 같았으며 놓여진 돌들의 모습은 고기비늘처럼 눈부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 후 홍수로 붕괴되었으며 1845년에 전주부성 사람들을 동원 개축하였다. 1896년에는 승지 김창석이 사재를 털어 개축했으나 오래되지 않아 무너졌다. 그후 1931년 박기순(朴基順)이 이곳에 다시 나무다리를 가설했다. 서천교를 박참판다리로 부르는 이유다. 1931년 12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읍민교통을 위해 서천교가 박기순씨에 의해 가설됐다고 적고 있다.

나중에는 그냥 참판다리라고 불렀다. 사실 지금은 참판다리하면 어디여 하지만 좀 나이든 어른들은 그래도 안다.

훗날 박기순은 이 서천교 다리돌을 옮겨 완산에 청학루(靑鶴樓, 옛 국악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대신 목교(木橋)를 현 서천교가 있던 자리에 놓았으나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다.

때문에 박참판다리를 건너가야만 했던 청학루는 나중에 국악원으로 사용되어 국악원으로 사용으로 전주의 전통예술 보급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래서 현재의 서천교는 옛 서천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다리다.

1966년 8월 11일자 전북일보 기사는 ‘망각속의 서천교’란 제목에 한때 전국 팔도 나그네들의 다리로, 서천평교의 돌들을 옮겨 인근 청학루 계단으로 사용했다고 기록하며, 당시 전주시민의 6분의 1인 2만 여 명이 매일 징검다리나 다름없는 가교를 이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유일한 관광지인 완산칠봉의 통로라는 점을 들어 서천교 복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1967년 6월 서천교 가설공사 기공식이 있었다고 다른 날자의 전북일보 신문에 나온다. 당시 남전주 개발을 위한 목적이 컸다. 국고 보조금 1,200만원으로 착공된 이 다리는 길이 80m, 폭 7m로 완공 후에는 하루에 1만 여 명의 시민들이 왕래를 했으며, 완산칠봉, 청학루 등으로 가는 관광도로 역할까지 했다.

이어 1995년 11월 5일부터 1997년 6월 10일 재가설한 것으로 다리에 적혀 있으며, 시공자는 (주)신일, 설계자는 (주)호남기술공사가 맡았다.

매곡교와 완산교에 비하면 서천교 주변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서천교는 전주부성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벽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데, 서문밖장과 남문밖장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여인숙과 여관 등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전주천에 제방이 쌓이기 전에는 전주천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전주천 근방까지 장옥과 초가집들이 들어차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전주천 가운데 쯤에 책방거리가 있었다.

즉, 매곡교에서 서천교 사이론 책방거리가 있었던 것. 책방거리는 전주 천변에 제방이 쌓이기 전에 있었으며 전주천 물길에 가장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춘향전, 흥부전, 숙영낭자전 등등이 출판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한국고대소설 출판 본거지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간판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다가서포’, ‘서계서포’ 등과 같은 책방 이름들은 몰랐다고 한다.

매곡교(연죽교)와 서천교 사이에는 쇠전이 있었다가 훗날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을 지나면 소금전이다.

현 서천교 서쪽편 완산교회 앞에 서천교 창건비가 있다. 서천교 건립을 위한 자금의 마련과정이 전면에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기금을 조성한 사람들의 명단과 액수가 기재되어 있다. 서천교 창건비 바로 옆 서천교중건기념비는 1968년 10월 21일에 새워졌다.

서천교는 조윤호(1848-1866, 요셉)가 1866년 12월 23일 순교한 곳으로,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형벌에까지 삼강오륜을 지켰는데, 부모와 자식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에 처형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부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어 아무리 대역 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조윤호도 그런 경우이다.

때문에 조윤호의 아버지인 조화서(1815-1866, 베드로)가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조윤호는 12월 23일 이곳 서천교 다리 밑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걸인들로 하여금 새끼줄로 목을 감아 끌고 다니게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하며, 다른 증언록에는 시신을 용머리에 갖다 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햇다고 기록, 그 행방을 알수 없다.

조윤호는 아버지와 함께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각각 올랐다.

서천교 옆엔 조윤호순교비가 있다가 최근에 천주교 전주교구청이 모자이크로 바꾸었다. 천주교 순교터 서천교라는 표석이 지난날 전주 사람들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상징물로 오늘도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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