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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4> 싸전다리

 전주 싸전다리(구 전주교) 밑은 그야말로 은빛천국이다.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연중 내내 노인들로 넘쳐난다. 예닐곱명씩 그룹을 지어 오순도순 화투를 치기도 하고, 노랫가락에 춤을 추기도 하고, 구경에 바쁜 이들도 눈에 띈다. 싸전다리를 찾는 어른신들은 60대부터 90대까지 연령제한이 없는데다가 봉동 이서 임실 김제 심지어 남원에서까지 원정을 오는 경우도 있다. 전주에 노인들이 편안한 쉼터로 이곳만한 곳이 없어서 일까. 물가에 고기잡는 중대백로의 날갯짓이 볼거리다. 다리 밑에 앉아 있자니 ‘옳거니!’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옛날에 촌에서 쌀 가져와 갖고 여그다 퍼부서분 디여”

전주부성은 호남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며, 또한 영호남의 중요한 통로로 교통이 번화한 곳으로 인물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그래서 전주천에는 예로부터 전주 인근지역으로 왕래하기 위해 남천교, 싸전다리(현 전주교), 서천교, 그리고 완산교 등 다리가 만들어졌다.

전주천의 싸전다리. 옛날엔 이 다리목을 끼고 싸전(쌀가게)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명칭이 ‘싸전다리’다. 바로 아래 설대전다리(현 매곡교)에는 담뱃대 가게가, 소금전다리(현 완산교)에는 소금가게가 있었다고.

전주사람들은 싸전다리를 전주의 으뜸되는 다리로 여기며, 명칭은 싸전다리-전주교-싸전다리(1999년 명칭 제정)로 변모를 거듭한다.

싸전다리∼매곡교 구간 동북쪽 제방 위로 길게 펼친 남부시장은 당시 ‘남밖장’으로 불리었으며 2, 7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두 다리 사이의 둔치에서는 되쟁이 쌀장수, 담배, 담뱃대, 나무땔감, 우시장 등 온갖 잡상인이 몰려 반은 사람 반은 우마차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들에 떼밀려 저절로 발이 옮겨질 정도였다고 전한다.

싸전다리라는 이름은 이때 붙은 것이라고 이곳 토박이 어른들은 추정하고 있다. 싸전다리는 쌀도가들이 몰려 있는 풍남문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로, 쌀과 생활용품을 교환하려는 농민들의 부산한 발걸음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은 아닐까.

1923년에는 남문시장과 서문시장이 통합돼 전라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다지만 맞은 홍수로 천변 인근의 서민들과 상인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홍수가 휩쓸고 간 뒤) 천변에는 아침 저녁으로 빨래하는 아낙네들로 들어찼다. 주로 남천교와 다가교 부근이 빨래터로 인기가 높았다… 빨래방망이 소리는 전주의 교향곡이었다고나 할까. 빨래하면서 시어머니 흉도 보고 쌀값 오름세를 나누며 시끌벅적하게 입놀림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여럿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드럼통에 빨래감을 삶는 장사꾼이 있었는데, 비싸지도 않는 돈 대신에 장작 몇 개를 주기도 한다….”

“완산다리에서 현재 전주교 중간 지점까지 천변쪽으로 판자촌과 하꼬방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이 하꼬방은 천태만상의 복마전을 이뤘다. 종이방, 주점, 국수집, 수제비집, 옷전, 기름집, 개고깃집이 양쪽으로 꽉 들어찼다.…”(송영상의 ‘전라도 풍물기’)

싸전다리는 본래 자그마한 나무다리(木橋)에 불과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22년 콘크리트 다리로 새로 지어진다. 싸전다리는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사탕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1936년 대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은 유일한 다리로,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근대 교통망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역할을 해냈다.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더 많은 물산을 싸전다리로 집중시켰다. 지금의 다리는 1965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노인들의 내기 장기, 화투놀이가 성행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 20여 년 전부터이다.

싸전다리는 전주의 큰 길목인 팔달로 끝머리에서 남원, 순창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옛 남문밖시장(지금의 남부시장)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쌀장수들이 자리를 잡아 싸전다리(米廛橋, 미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렇다. 조선말기 상거래가 이루어진 곳으로는 전주천변을 따라 펼쳐진 장들을 들 수 있다. 전주교, 즉 싸전다리 밑으로론 ?싸전?이, 매곡교 근처에는 ‘쇠전’, ‘설대전’이 섰었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쇠전과 설대전 맞은편 부남 은송리 앞의 전주천변은 초록바위 아래까지 ‘나무전’이 펼쳐졌다.

싸전다리에는 삼베자루에 반도 되지 않게 담은 쌀자루, 팥, 깨, 콩은 물론 보리며, 콩깻묵 누룩을 팔았으며, 전국을 상대하는 쌀 거상도 자리잡았다. 이른 새벽 각종 곡물을 거둬 들이는 거상들이 있는가 하면 헐값에는 팔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앉아 호개독 하지 않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라도 만년지기나 오랜만에 만난 사둔처럼 농사얘기, 애들 혼사 얘기들을 정답게 나누기도 했을 터이다.

지금의 싸전다리는 1964년 4월 29일 착공, 1965년 9월 5일에 완공된 것이다. 당시 시공청은 호남국도건설국, 시공자는 (주)삼협사로, 공사 금액은 1,858만2,594원이 투자된 다리로, 전주-남원 간선도로가 뚫리면서 새로 놓였다.

폭 25m, 길이 78m로 그 때만 해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교량으로, 개통식장에서 호남국토건설국으로부터 전주시에 인계됐다. 당시 전북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원 순창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하루에 1만7,000여명의 통행자와 800여대의 자동차, 수많은 우마차가 다녔다고.

싸전다리는 새로운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전주부성을 둘러 흐르는 전주천을 중심으로, 동편으로는 낙수정에서 흘러내린 물길과 기린봉 북록에서 시작된 모래내가 인근 마을들의 물줄기가 되고, 남쪽으로는 남고산성의 물길을 모아 흐르는 산성천, 남고산, 보광재에서 흘러내린 물이 공수내를 이루어 전주천의 물길을 더한다.

다시 말해, 남고천은 구이면 평촌리와 경계에 있는 보광재(280미터)에서 발원, 흑석골을 지나 남문시장의 전주천 맞은편의 곤지산 동쪽 기슭에서 싸전다리 서편의 전주천에 흘러든다.

비록 지금은 하천정비공사로 1970년대 이후 인근의 초록바위가 자취를 감추고 공수내 물길은 하천 복개로 인해 모습을 상실된 지 오래지만 과거엔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 올 정도로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완주군 구이면의 평촌사람들이 산나물이며, 약초 등을 팔러 보광재를 넘어 싸전다리로 나갔을 것이며, 구이,운암쪽으로 길이 나기 이전까지 전주사람들이나 구이사람들이 넘나들었던 길로 활용됐을 것이란 이성재 화백의 설명이다. 또, 완주 상관으로 가는 길목으로, 땔감을 전주로 나와 팔려는 사람들이 꼭 건너야만 하는 다리였다.

하지만 싸전다리 바로 밑 초록바위 부근에서는 1866년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있었고 동학농민군의 수장인 김개남장군이 사형을 당했다.

홍수 제방공사를 하면서 상당부분이 깎여 현재로서는 바위의 모습을 완전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기록에 의하면 초록바위는 다가산 아래 그 산세가 갈마음수격(渴馬飮水格)으로 ‘말이 풀밭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명명했다고 전한다.

 

 싸전다리

                         -박성우

 

 쌀 됫박이나 팔러 싸전에 왔다가 쌀은 못 팔고 그냥저냥 깨나 팔러 가는 게 한 세상 건너는 법이라고,

오가는이 없는 싸전다리 아래로 쌀뜨물 같이 허연 달빛만 하냥 흐른다.

 

야 이놈아, 뭣이 그리 허망터냐?

 

싸전다리는 여름이면 인근의 노인들 놀이터로 변한다. 전주시가 맑은 물 운동으로 쉬리가 서식할 정도로 깨끗해졌지만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없으며, 더더군다나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초록바위 인근의 곤지산은 반쯤 깎여 나가 흉물스런 배꼽을 드러낸 채 아스팔트 도로 위로 헉헉 염천(炎天)의 더위를 품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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