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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꽃담

임실 영모재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마도 있다면, 비단같은 마음결에 존재하는 숭고한 효심이 아닐까란 생각이다.
 

옛 사람들은 처서가 지난 요즘처럼 온도차가 심한 날이면 의관을 정제한 채 아침 저녁으로 부모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실천했다.
 이 말은 겨울에는 ‘따뜻하게(溫) 여름에는 시원하게(淸) 해드리고,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고(定)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省)’는 ‘온청정성(溫淸定省)’과 도 뜻이 통한다.
 또,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동온하청(冬溫夏淸)’도 ‘예기’에 나오는 말로, 그 맥이 엇비슷하다.  
 그래서인가, ‘효도 효(孝)’자는 자식이 늙은 어버이를 부축하여 업고 가는 모습을 본뜬 글자다.
 어쨌든, 효사상이 가장 중요한 도덕 규범으로 정착될 당시엔, 부모를 대하는 얼굴 가짐을 중시했다.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겨야 했지만 인간인지라 그것이 도통 쉽지 않은 일이라서 ‘색난(色難)’이라고 했고, 또 부모의 잘못을 보면 ‘간언(諫言)’은 하되 뜻은 거역하지 않으며,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간 그들의 평소 생활 습관마저 바꾸지 않고 지켜내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평소의 생활 가운데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교에 효경이 있다면, 불교엔 부모은중경이 있으며, 가톨릭과 기독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십계명에 집어넣었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했을 것이란 판단이다. 하물며, ‘반포지효’라고 해서 까마귀 같은 미물들도 효를 실천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임실의 ‘영모재(永慕齋, 임실군 신평면 대리마을)’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보통, 재의 이름을 ‘영모’로 지은 것은 자손들이 조상의 묘소를 반드시 영원히 사모하고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 때문인 것 같다.
 ‘영사(永思)’ 즉, ‘오래토록 생각하며 가슴속에 새겨둔다’는 ‘서경’의 ‘대고편’의 내용은 민간에서 조상이나 선현을 모시는 사당에 영모당, 또는 영모재로 뜻이 옮겨져 쓰이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어린 내가 길이 어려움을 생각하니(永思) 아! 진실로 어리석게 날뛰면 홀아비나 과부들이 가엽게 되겠지만 내가 하는 일은 하늘이 시키신 것이다. 내 몸에 큰 일을 물려주고 어려운 일을 던져주시니, 어린 나는 스스로를 돌볼 겨를이 없다’

 ‘영모’의 진정한 뜻은 마음에 근본을 두고, 집에다 외형적인 것을 나타내어 말함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필요없다. 영모재에 들어오면, 황홀하게 돌아가신 부모를 뵙는 듯, 몸소 실천하는 만큼 영원히 사모하는 것 아닌가.
 후손들의 영모하는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 아버지의 업을 또 자식이 이으니 영원히 사모하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죽더라도, 그 정신은 천년만년의 다리를 놓으니 종교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감 때문인가, 영모재의 ‘정부인여산송씨’ 여각은 온데 간데 없고, 달랑 ‘묘갈명 병서’란 비 1기와 함께 키가 훤칠한 은행나무 2그루, 그리고 속절없이 우니는 매미들의 합창이 전부다.
 그래도 흙담의 4곳(담장 입구 좌측 2곳, 오른쪽 1곳, 옆 담장 1곳)에 꽃담이 존재해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암키와 20여 장을 이용해서 만든 둥그런 꽃들을 모두 헤어려보니 모두 18송이. 둥근 꽃들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너무 반듯반듯한 그 아래의 암키와들로 인해 투박한 맛은 그다지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전통 담은 주 건축물의 몸체와 같은 계통의 재료로 통일감을 갖고 있으며, 외부 환경의 여러 구성 요소를 둘러 쌓음으로써 하나의 통일된 공간 속에 융합시켜 준다.
 이곳의 꽃담은 첫째, 지형적인 영향을 깊이 받고 그러한 환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으며, 신의 섭리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사상이나 태도를 갖게 만들었으리라.
 둘째, 선조들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기원을 담아 형이상학적 형상을 담장에 표출한 듯 하다. 기와를 담장에 수놓으면서 후손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으며, 이들이 조상들을 향한, 효심을 기원하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 아름다운 의장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높은 조형미를 갖고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전통 담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시련을 겪는 역사 속에서도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특한 조형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우리의 전통 담을 오늘날 서구화된 생활 양식과 조화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갔으면 하는 데,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다.
 아무튼 이곳의 꽃담은 살아있는, 생생한 ‘효자도’다. 민화 가운데 설화화는 교훈적인 내용, 교육적인 내용, 충효를 나타내는 내용, 애정을 다룬 것들이며 설화뿐 아니라 인물에 관한 내용의 그림이다.
 선조들은 효자도를 통해 자녀들에게 효도의 중요성과 방법을 글이나 행동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죽순과 잉어가 나오는 효자도는 중국의 맹종이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눈이 쌓인 대나무밭에 들어가 뜨거운 눈물로 눈을 녹이고 죽순을 돋아나게 했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왕상도 병든 어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드려 바쳤다고 한다.
 복을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담겨 있는 영모재의 꽃담은 따라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꽃송이에 담긴 뜻을 똑바로 읽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리라.
 영모재 꽃담을 현실로 보여준 사연이 하나 있다. 최근 들어 전주 학인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소장 수원백씨 가문의 유물 15점을 전주역사박물관에 기증, 기탁돼 앞으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학인당(백광재, 25세, 백락중의 증손자)으로부터 기증된 유물은 고종 때 효자로 이름난 학인당의 주인공 백락중이 그의 어머니 여산송씨를 모셨던 영모재(1905년-2003년)에서 나온 것이다.
 학인당이 3년 동안 잘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을 결정했으니 흐르는 피는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효심의 꽃송이’로 결실을 맺게 될 날만 남았다.
 재실의 건물이 지난 2003년 재실 보수의 어려움과 집안 사정 등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에 매각됐지만 남겨진 현판을 잘도 보관한 정성에 넉넉한 효심도 읽을 수 있다.
 ‘열녀가의대부증내부협변효자백진수처정부인여산송씨지려(烈女嘉義大夫贈內部協辨孝子白晉洙妻貞夫人廬山宋氏之閭)’라고 쓰인 현판은 문양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수원백씨 가문에서 일궈낸 효행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백락중의 효심을 보게 하는 내용들과 함께 ‘무궁지사야 위지명기(無窮之思也 爲之銘其,)’, ‘영모(永慕)’, 즉 ‘영원히 흠모한다’는 뜻을 나타낸 비 앞에 서 있다.
 정철의 안민가처럼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를 신조로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우리들은 인간인지라, 바람과 나무의 탄식이란 말로,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 '풍수지탄’하지 않고 살았으면 더 없이 좋으련만. 영모재의 낡을 대로 낡아 빠진 꽃담이 ‘풍수지탄’ 말라고 소근소근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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