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 세계적으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존경받는 부자로 회자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미 300년을 앞서 '이타적' 성공으로 존경받는 부자 가문이 있었다. 바로 ‘경주 최부잣집’으로 12대 300여 년 동안 자기에게는 엄격하면서 이웃에 대해서는 배려를 가문의 원칙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사회의 등불이 돼왔다.
경주 최부잣집이 300여 년 동안 부를 이어 온 배경은 다름 아닌 절제와 남에 대한 배려였다. 그 원칙들이 이른바 최부잣집의 수신의 철학인 ‘육연(六然)’과 제가의 철학인 ‘육훈(六訓)’에 담겨 있다.
육연이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초연하고(自處超然), 남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하며(處人超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無事超然), 일을 당해도 겁내지 말고 용감하게 대처하며(有事斬然), 성공했을 때에는 오히려 담담하게 행동하고(得意澹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오히려 태연하게 행동하라(失意泰然)는 것이다.
육훈이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 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의 6가지 덕목이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갖고 있는 논과 밭을 그야말로 헐값으로 내다팔았다.
육훈에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제어하는 절묘한 도덕률의 장치를 담고 있다. 더욱이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야 했다. 무명옷은 지금으로 보면 결코 명품이 아닌 ‘시장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실천이 있었기에 최부잣집은 300년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조선팔도에까지 그 명성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 최부잣집은 돈은 벌되 권력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대신 명예를 택했다. 돈과 명예가 조화를 이루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최부잣집은 육훈과 함께 육연의 실천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300년 만석꾼에서 전 재산을 교육에 바침으로써 빈털터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손자인 최염에게는 유산 한 푼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최부잣집이 300년간 뿌려놓은 적선의 정신뿐이었다.
전주 경기전 대밭에는 올곧은 선비의 결기같이 솟은 대나무가 봄바람에 흔들리면서 서늘한 소리를 떨군다.
밤이면 태조로의 밤을 수놓는 청사초롱 하나둘씩 불을 밝혀 반짝반짝. 댓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눈이 부실 정도로 황홀한 내 심사. 전주에도 경주 교동에 버금갈 최부잣집(풍남동 3가 전주 코아리베라호텔 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구동성으로 최부자댁이란 말을 하는 것일까. 최부자란 최한규씨를 지칭, 전북여객의 초창기 사장으로 방직, 금광, 석유회사 등을 운영한 까닭에 붙여진 말 같다는 손자 최효성(전주 효자산부인과원장)씨의 설명이다.
이곳에서 4대째 살아오고 있다는 최효성씨는 동네 형, 동생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았던 추억의 동네로, 집 앞의 길은 그 옛날엔 제법 큰 편에 속했으며, 보기 드물게 포장된 도로이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아주 작은 골목길로 변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에겐 오래 전, 드라마 또는 영화 촬영이 몇 차례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주시가 토담길(옛날 큰 토담의 한옥집이 많이 있었음을 반영)로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주 최부자댁 토담집은 오목대가 조망되는 남향으로 ‘ㄱ’자 형태의 한옥이다. 입구 부분은 사랑채 옆부분을 벽돌로 쌓아 올려서 마루를 막은 형태다. 집안은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최부자댁의 볼거리는 집안의 우뚝 솟은 굴뚝과 앞채의 밝은 색조의 붉은 전돌을 작고 예쁘게 따로 만들어 바람 구멍에 솜씨를 부린 ‘십(十)’자형 바람 구멍 꽃담, 그리고 토담에 기왓장을 쿡쿡 박은 꽃담장이 단연 압권이다.
토담에 핀 꽃은 하나, 둘, 셋 세 송이다.
맨 위에 암키와 5-6장을 서로 맞대어 꽃잎을 만들고, 바로 그 아래 암키와 여러 장으로 좌우 대칭의 꽃잎 모양과 줄기를 통해 꽃봉오리를 잘 형상화해 전주최씨 가문의 기풍과 순박한 전주 양반들의 여유로운 삶을 그려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밑을 수줍게 애무하는 바람이 지나간다.
최부자댁은 진정한 ‘3락(三樂)’을 추구했음이요. ‘3여(三餘)’를 통해 조금은 긴장하게 살면서도 삶의 찌꺼기들을 덜어내야만 하는 ‘3척 돌부처’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았던가.
남아도는 낡은 기와를 이용해 꽃담을 베풀 듯, 책 읽기에 좋아하는 세 가지 여가를 의미하는 ‘독서삼여(讀書三餘, 한 해가 여유로운 겨울, 하루가 여유로운 밤, 그리고 비오는 때)’로 인해 최부자댁이란 호칭을 얻었으니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꽃담은 ‘부성3화(府城三花)’처럼 투박하면서도 화려한 맛, 그리고 정겨움이 배어나는 전주의 정신을 올곧게 나타내는 문화유산은 아닐까. 예로부터 전주 동고산의 진달래, 다가봉의 입하화, 덕진지당의 연화를 전주의 ‘부성3화(府城三花)’로 불렀단다.
이 가운데 덕진지당의 연화는 덕진채련으로 부르면서 저녁 노을과 달밤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수에서 피리소리에 젖어든 가운데 짐짓 꺾어든 연꽃의 풍정을 완산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두샘은 쓸 일이 없어졌고, 기와로 올린 대문도 철제로 바뀌었지만 석등, 학독, 다듬이돌과 꽃담만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세월의 이끼를 머금고 있다. 갑자기 꽃담을 만든 집주인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다 뜨거워진다.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최한규(최부자)씨는 흡사 ‘경주 최부자집’의 제가 철학처럼 생활이 어려운 화가와 문인들을 후원해주면서 말 그대로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토담집을 활용케 했단다.
최효성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전주최씨 대호군파 13대 종손으로, 서울대 법대 3년을 다니다가 6.25동란이 발생하자 19세에 동생(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등)들을 뒷바라지 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인이 박힐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런 그가 유언으로 남긴 것은 일가 친척들에게만 자신의 죽음을 알리되,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라고 했단다. 물론 묻힐 선산도 넉넉하고 좋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포기했다는 가슴 아린 사연이다.
현재 최부자의 며느리와 아들 내외가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작은 길에 많은 차량들이 주차함으로써 길이 더욱 좁아지게 되고, 간혹 큰 차들이 지나가면서 토담을 부숴 버리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기도 한단다. 전주시내 8백 여 채의 한옥 가운데 유일한 이 꽃담은 문명의 이기로 인해 요즘 들어 무척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토담집의 일반 건축물대장과 토지대장을 보니, 허가 일과 사용 승인 일자는 1922년 10월, 연면적은 228.08㎡, 전체 면적은 1,593.4㎡, 소유권은 최효성씨로 돼 있다.
최효성씨의 어머니는 시아버지 최한규씨가 조그마한 한옥 열 채를 매입한 후 1939년에 지어 이사왔다고 증언, 앞의 토지대장과 엇갈리고 있다. 꽃담은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란 설명이다.
담장 밖으로 큰 키를 자랑한 채 우뚝 서있는 향나무와 담장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 넝쿨들이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정원 너머로 6월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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