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 사람들의 피서법은 ‘거창(居昌)’하다 못해 정말로 ‘거창(巨創)’하다. 연극을 통해 5대양 6대주 지구촌 사람들을 한곳에 불러 모으는 아주 큰 피서지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거창국제연극제는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황산마을 수승대 야외무대에서 매년 여름 무렵 막이 올라 관객들이 시원하다 못해 한기까지 느끼게 할 정도의 계곡에 발을 담근채 화려한 자연 속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여름밤의 별을 벗삼아 연극에 빠지다 보면 더위를 느낄 겨를마저 잊게 만든다.
경남 거창은 바람소리마저 빚어내는 산고장수(山高水長)의 고을이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고장으로, 덕유산과 가야산, 지리산을 지척에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 이 여름이면 상념에 짙은 초록숲으로 몸을 내던진다. 연극을 보면서 텐트를 치고 은하수 아래에서 밤을 보내도 좋은 일이거니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당일치기로 놀다 오는 것도 꽤나 좋은 일이리라.
개울가에서 아이들이랑 피라미를 잡고, 폭포수에 등목도 하고 잠자리를 잡으면서 이내 ‘숲의 공기’엔 청향(靑香)이 깃들어있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숲의 향기에 취해 문득, 선잠에 빠진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로 변신한다. 나이 먹어 편히 기댈 수 있고, 외로운 날이면 낙엽 하나 발밑에 깔아줄 법한 소담한 나무 한 그루를 오늘 이 순간, 지금부터 키우기로 결심한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어떤 방법으로 더위를 쫓았을까.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쓴 '다산시문집'에 보면 8가지 피서법이 나온다.
△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두기 △소나무 단(壇)에서 활쏘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뛰기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 △동쪽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오는 날 시 짓기 △달 밝은 밤 발 씻기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 추천법인 '탁족'은 '탁영탁족(濯纓濯足)'이란 고사성어에서 나온 말로, 갓끈과 발을 물에 담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인격 수양의 의미도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선비가 바람에 머리카락을 말리는 모습을 그린 조선 중기의 화가 이경윤의 ‘고사탁족도’가 바로 탁족화이다. 탁족이란 말에는 ‘군자는 벼슬의 진퇴를 신중하게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깊은 산 속에서 그곳(?)을 드러내고 볕을 쬐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은 과학적이면서도 여유로운 선비들의 피서법이었다.
이인상, 윤두서 등 조선 후기의 이름난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송하관폭도’에는 폭포수 아래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요즘처럼 바람 한 점 없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칠 때, 옛 사람들은 바람 잘 통하는 뜰이나 마당에 두어 자 쯤 높이의 평상을 내어다 댓자리나 돗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지체높은 선비들은 사랑방에서 체온이 뜨거운 마나님 대신 대줄기를 엮어 긴 원통형으로 짜 만든 `죽부인'을 껴앉고 잤는데 허전함을 덜 뿐 아니라 대나무의 서늘한 기운과 통풍이 잘돼 쉽게 잠에 빠지곤 했다.
어떻게 하면 세속의 시름을 잊고 이 무더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국경지대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고 해서 ‘근심 수(愁)'자에, '보낼 송(送)'자를 써서 처음엔 ‘수송대(愁送臺)’라고 했다.
자신의 목숨을 건 행차.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없이 떠났을 것인데, 과연 저 아름다운 모습이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들어왔을까.
‘수송대’는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1543년(중종 38년) 퇴계 이황선생이 마리면 영승촌의 장인(권질)댁에 머물다 떠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 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 속에는 회포만 쌓이는 구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사율시를 보내면서 요수 신권(1501~1573)선생이 대의 면에 새김에서 비롯됐다.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 주시는도다.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어둔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 어본다’
맑은 계류가 넘쳐나는 이승 최고의 무릉도원이 수승대다. 경내에는 구연서원,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산고수장비, 암구대, 500년생 은행나무, 현수교 등이 바위와 계곡과 어우러지면서 수려함을 뽐낸다.
수승대 유원지 안에 자리한 구연서원은 1694년(숙종 20년)에 지방 유림이 요수 신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구연서원의 앞뜰에는 관수루가 있다. 자연과의 조화라는 한국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을 잘 보여주고 누정 건축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입면의 비례가 뛰어나 학술적 가치가 높다.
‘관수(觀水)’라는 뜻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연유한 것으로,
‘물을 보는 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는 글에서 따온 이름이다.
세상을 보는 일, 나 자신을 추스르는 방법을 일러주는 말씀인 셈이다.
'물을 보고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란 글귀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피서지:명승 제53호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수승대’ 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이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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