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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6.25 60주년 기념, 특별전 “굳세어라 금순아!”

시발차 관련사진
 
6.25 60주년 기념, 특별전 “굳세어라 금순아!”
작성자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0.06.10
조회수
49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의미 있는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의 제목인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알 수 있듯이, 6·25 전쟁과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고, 생활사 속에서 전쟁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굳세어라 금순아 전시포스터


이번 전시의 주요 내용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우리가 겪은 전쟁과 외국인의 눈에 비친 6·25를 동시에 조망하여, 다양한 시각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줄 예정이다. 2부는 피난처에서의 피난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규명할 것이다. 전쟁 중 이었지만 일상의 삶은 계속 이루어졌음을 제시할 것이다. 3부는 전쟁 중에 유입된 서구문화의 영향과 결과, 또한 전쟁은 끝났지만 반공에 대한 관념은 지속, 유지되는 사회상을 보여줄 것이다. 4부는 전쟁의 잔존인 이산과 실향민들의 아픔을 조망할 것이다. 또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여 및 기증해 준 사연품을 가지고서 이들이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상처를 치유해 갔는지 조망하게 될 것이다.

전시장에는 6.25 전쟁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체험 코너>>를 만들었다. 가령, 3D영상을 이용한 삐라 체험 및 피난민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피난민촌 영상체험,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 쓰기 체험, 전쟁놀이판 체험, DDT로 이 잡기 놀이 체험 등이 이루어진다. 

한편, 민속영상실에서는 6.25전쟁을 다룬 영화를 상영할 것이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쟁을 다룬 몇 편의 영화를 시간대별로 방영하여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장을 마련하였다. 

 

전시기간 : 2010. 6. 23~8. 23(62일간) 전시장소 :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 I / 민속영상실 

특별전 준비

1. 국민이 동참하신 전시 기획

6.25전쟁 특별전은 박물관 독단적인 것이 아닌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전시로 발전시킨 것이 민속박물관 기획 전시에서 보인다. 우선 전시명은 “굳세어라 금순아!”와 관련하여 ‘금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월남한 분을 찾아 회갑상, 선물 기증, 전시관람 및 도록 제공 등을 한다. 또한 자신들이 겪은 6.25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구연하는 장을 마련하여 6.25를 겪지 않은 세대에게 산교육을 실시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 문의를 한 ‘금순’이는 20여명이 넘으나, 일부는 고령의 나이로 행동에 제한이 있어 이번 전시와 관련하여 참여하신 분은 현재 7명에 이른다. 그런데 동참하신 ‘금순’이 가운데는 함경도 함흥 흥남부두에서 피난 온 분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제목이 일정 부분 사실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속박물관에서는 6.25 전쟁과 관련한 개인소장품 전시를 한다. 소장품을 대여한 분들은 군인, 학도병, 기자, 외국인, 일반인 등으로 구별된다. 군인의 경우는 전역증을 비롯해 훈장, 제대증명서, 장병수첩, 군인사진, 참전용사증서, 방명록, 군표, 기장 등 다양하다. 학도병의 경우는 입영을 축하는 축문이 보이며, 기자의 경우는 카메라 때문에 목숨을 건진 기자의 사연도 전해진다. 일반인의 경우는 학생증, 시민증, 일기, 무명버선, 가방 등 일상생활 용품이 대여받았고, 외국인의 경우는 미군 군의관 신분으로 부산에서 근무한 버스턴(Dr. Charles J. Burstone, 현 미국 커넥티컷 치과대학 명예교수)박사의 400피트(ft.) 릴에 감긴 8mm 규격인 영화필름이 있다. 영화필름에는 한국전 당시 미군비행장이 위치했던 수영만(현재의 수영구) 일대에서 촬영된 것이다. 농사짓는 모습에서부터 풀빵장수, 국수장수, 싸전 등이 등장하는 시장모습, 강가에서 물놀이하는 벌거벗은 아이들의 모습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회상에 젖은 미소를 짓게 하는 화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장면들에 이방인의 호기심 어린 시각이 잔뜩 묻어있다. 이들 자료는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관람객들로부터 직접적인 호응을 얻을 것이다.     
      

2. 당시의 생활상 재연

6.25전쟁과 생활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의 모습을 재연하였다. 재연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가두암실과 시발택시를 뽑을 수 있다.


1) 가두암실


6.25전쟁 때 신분증은 생명과 같았다. 신분증이 없으면 결국 죽음으로 몰릴 수 있는 있기 때문이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는 사과궤짝을 이용해 암실을 만들고, 20-30분의 속성으로 사진을 인화해주었다. 그래서 이것을 신문에서는 ‘궤짝 사진관’이라고 불렀다. 민속박물관에서는 6.25전쟁 기간 사용하였던 가두암실을 복원하여 전시를 한다. 박물관에서는 가두암실을 만들기 위해 가두 암실을 제대로 고증해줄 수 있는 원봉식 선생님(1933년생)을 찾았고, 그 분을 통해 가두암실의 구조 및 인화에 필요한 장치와 약품, 도구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두암실을 주로 이용한 고객은 부산으로 피난 온 부두노동자로써 사진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길거리 사진관을 이용한 것이다.

궤짝사진관에 대한 언론보도(1950년대 경향신문)

궤짝사진관  “우선 빨라서 편리”…몇 세기나 뒤떨어진 수법이지만
「시민증」「신분증」등 각종 증명 사진이 급한 사람들에게 十분이면 되는 거리의 속성사진사들- 방법이 十九세기 이전의 고색이창연한 수법이지만 빨라서 편리하다. 시민증·병적증명서·야간통행증·기간요원증 등 대 여섯 가지의 증명서를 갖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한 사회적인 유물(遺物)이라고 할까? 암실, 확대기니 현상약 그릇 등 복잡한 시설이 필요 있다. 이 조그마한 궤짝 속에 다들어 있다. 「카메라」만 있으면 어딜 가서든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뜨내기 사진관 - 이걸 「아르바이트」로 하는 대학생도 있다. 「우표」만한 증명사진 석장에 100환-모(角)가 다닥다닥 갈라진 「베니야」간판이 갖은 풍상을 겪은 것 같다.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해서 하루 몇 백환 씩이라도 벌려고 빠득빠득 애쓰는 것은 얼마 후에 「현상」「인화」「확대」의 조그마한 가게라도 벌일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삿타」를 누르자마자 사진이 되서 나오는 문명의 이기(利器)와는 몇 세기 동 떨어졌지만 이건 이것대로 또 먹고 사는 길이 있다.


2) 시발차
시발차 관련사진

민속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차인 시발(始發)과 당시의 설계도면 등을 전시한다. 시발차는 과거의 시발을 재연한 차량이고, 설계도면은 최씨 삼형제가 독립기념관에 기증을 한 것이다.

시발차는 최무성씨 등 삼형제가 서울 을지로 1가 공터에 천막을 쳐놓고 불하받은 지프의 부속품을 이용하여 만든 지프형의 첫 국산차로 1955년 8월에 내놓았다.

비록 지프 모양의 4기통의 차였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자동차였다. 기술이나 제조설비와 공부가 부족했던 시절, 놀랍게도 시발차의 엔진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국산화율이 50%를 넘어 민족의 긍지가 대단했다. 처음 한 대 만드는 데 4개월 걸렸던 최초의 「시발」값은 8만환 이었으나 잘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디자인이 볼품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였지만 가짜 엔진을 얹은 시발이라는 나쁜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비록 지프차의 엔진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지만 시발차의 엔진을 국산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 엔진 기술을 배웠던 김 영삼이라는 기술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기술이나 제조시설이 미약한 상태였던 시절에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 박람회가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고, 여기에 출품한 「시발」은 크게 눈길을 끌었다.

승용차가 귀한 당시로서는 제작과정이 어떠하든 국산 자통차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게 됐고 신문들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최무성사장의 전 재산 투입과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탓인지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국산품으로 선정되어 뜻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통령상을 받은 「시발」의 주가는 하루아침에 뛰어올랐고, 「시발」을 사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초기에는 8만환에도 팔리지 않던 것이 대통령상 때문에 차 값은 당장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불과 한달도 못되어 1억 환의 계약금이 들어왔다. 이 돈으로 비로써 서울 원효로에 있던 주물 공장을 인수하여 겨우 자동타 공장의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았던 「시발」은 공급 능력이 계약을 따라가지 못해 매일 같이 먼저 차를 구매하려는 수요자들로 법석을 피웠다. 이렇게 되자 ‘시발’투기 붐이 일어났다. 일부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는 시발계가 생겨났고, 소위 빽이라는 권력을 업고 한꺼번에 2~3대씩 사다가 높은 프리미엄을 얹어 전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활발하게 돌아가던 시발은 5․16군사혁명으로 기력을 잃게 됐다. 공장 확장과 디젤 엔진 그리고 석탄으로 만든 스폰지탄 가스엔진 개발에 과대한 자금이 투입했던 시발은 산업은행이 약속한 1억 환의 자금지원이 5․16혁명 때문에 중단되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혁명 정부는 시발자동타를 자유당 정권에 연류 된 부정부패기업으로 낙인이 찍혀 자금 지원을 취소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시발은 예기치 못한 큰 복명을 만났다. 새 정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가재건을 위한 기반 산업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자동차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역사상 최초로 경기도 부평에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인 새나라 자동차 공업(주)이 설립되어 1,200cc급 엔진의 소형승용차인 「새나라」가 생산되어 비로써 자동차공학에 따라 제대로 만든 승용차를 탈 수 있게 됐다.

앙증맞고 예쁘장해서 모두들 ‘양장미인 차’라 불렀다. 이 새나라가 바로 시발을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상자형의 볼품없는 차인데다가 휘발유를 많이 먹는 시발차는 새나라가 등장하자 인기는 추풍 낙옆처럼 곤두박질 쳤다. 택시업자들은 앞 다투어 새나라로 바꾸었다.

한때는 300만환까지 호가하던 시발택시는 인기가 내려가기 시작한 62년 10:1화폐절하 개혁 직후에는 5만원까지 떨어졌고, 63년에는 3만원까지 내려갔다. 비록 지프의 폐차 부품을 이용해서 만든 차였지만 최초의 국산차인 시발은 55년부터 문을 닫을 때인 62년까지 2천 2백 30여 대를 만들어 승용차가 귀했던 전후의 자동차 교통에 큰 도움을 주었다. 62년 이후 시발 승용차의 생산을 중단하고 대형버스 조립공장으로 전환하여 2백여 대 정도 생산하다가 64년에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3) 피난민촌

피난민촌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한 공동체이다. 민속박물관에서는 피난민촌을 재연하고, 그곳에서 피난민촌의 생활 영상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준다. 피난민촌에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불 등을 전시한다.

또한 피난민촌에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금순’이가 등장하여 관람객들에게 소개를 한다. ‘금순’이의 고향을 노래가사처럼 함경도로 설정하여, 금순이의 말을 함경도로 바꾸었다. 함경도 방언을 위해 속초 아바이 마을 주민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하였고, 이 일을 속초시립박물관 한경태 연구사의 도움을 받았다. 


4) 노천 교실

민속박물관은 닥종이인형을 가지고서 노천 교실을 재연하고, 전시 때 사용하였던 여러 교과서를 전시한다.

6.25 전쟁 기간에도 교육열은 식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배움’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고, ‘학력’이 어떤 재산보다도 안전하다는 것을 전쟁 중에 체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라진 학교를 대신하여 천막을 세우거나 노천에서 칠판을 세워놓고 수업을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렇듯 뜨거운 교육열을 외국 언론에서도 다루었는데, 3부제, 4부제 수업은 물론 한 학급에 100명이상 수용하는 것도 불사하였다고 『뉴욕타임스』 (1951. 4.23)에 나오기도 하였다.

 

 전쟁기간에 발간된 교과서들도 다양하였다. 우선 정규 교과서들이 간행되었고,  반공과 애국을 강조하는 내용의 교과서들도 많이 발간되었다. 『어린이 반공생활』, 『애국생활』, 『겨울공부용 전시부독본』, 『우리도 싸운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교과서에는 나라의 위기 때마다 등장하였던 장군과 왕에 대한 위인전, 아군과 적군의 비행기를 구분하는 방법, 일기형식으로 나타낸 전쟁 체험 이야기 등을  수록하였다.


 대개의 교과서는 만들기 위해서 종이와 기계 등의 원조를 받았는데, 교과서 뒷면에 원조에 대한 내용이 국문과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은 국제 연합 한국 재건 위원단(UNKRA)에서 기증한 종이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 고마운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층 더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한국을 부흥 재건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자.” (1954, 고등국어Ⅰ)


“교과서의 종이는 미국 사람들이 자유 아시아 위원회를 거쳐 대한민국 학교 어린이들에게 보낸 선물이다. 미국 사람은 사람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한국의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하여 기증한 것이다.” (1952, 다른 나라의 생활 5-2)


 흥미로운 사실은 원조의 상황에 따라 교과서 가격의 변화가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명기해준 것이다.

 

“원조 종이가 제때에 도착되지 아니하여 할 수 없이 따로 종이를 사서 썼기 때문에 그 비용을 이 책값에 더하였다.” (1953, 국어 5-2)

 

 교과서를 통해 교육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상을 읽어낼 수 있으므로 좋은 전시자료라 할 수 있겠다.


3. 다양한 영상과 전시 체험

민속박물관은 6.25전쟁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관람객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영상과 다양한 체험 공간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삐라와 전쟁 일기, DDT와 이잡기 등을 들 수 있다.

1) 삐라 체험

전시장에 마련된 리플렛을 들고 관람객이 삐라 체험 코너에 도착하면, 손에 들고 있는 리플렛이 삐라로 바뀌어 마치 관람객 손에 삐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한다. 삐라 가운데 대표적인 10가지를 선정하여 관람객마다 다양한 유형과 문구의 삐라를 체험하게 된다.

전쟁을 할 때에는 물리적인 전쟁이외에 심리적인 전쟁도 동시에 수행한다. 심리적인 전쟁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의욕을 상실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을 목표로 한다.

“삐라살포”는 대표적인 심리전의 예이다. 삐라는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글씨와 사진, 그림 등을 넣었는데, 보통 짧은 글과 간단한 그림을 넣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긴 글을 넣어 만들기도 하였다. 

사실 ‘삐라’ 대신 ‘전단지’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전단지는 어떤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낱장의 종이를 말하는 데, 이 ‘전단지’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빌(bill)’을 일본 사람들이 ‘삐라’라고 발음했는데, 우리가 그대로 사용해서 아직도 ‘삐라’라고 하게 된 것이다. 

6.25 전쟁 때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북한군, 유엔군, 중국군 모두가 삐라를 만들어서 살포하였다. 자기나라의 글로 만들거나 아니면 상대편 나라의 글로 만들어서, 해당 국가의 군인이나 국민들 읽어보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삐라 이미지>



중국어로 된 삐라가 많은데, 대개 유엔군 측에서 만든 것으로 중국군의 참전이후 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삐라 이외에도 삐라를 신고하면 받게 되는 학용품도 같이 전시를 하게 되는데, 노트와 책자, 자 등이 있다. 특히 이중에서도 『철방구리』는 대표적인 반공 만화책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삐라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형식의 영상과 함께 보여주게 되는데 이를 통해 어린이들이 삐라에 대해 알 수 있게 되고, 전쟁의 실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게 만들었다. 


2) 일기 체험


민속박물관에는 전쟁 기간 개인이 작성한 일기 5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 일기 가운데 하나를 선정하여 전쟁 기간 중에 개인사를 영상으로 작업하여 편집하였다.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전후세대는 관련 사진이나 영상을 보아도 전쟁의 참상이나 아픔을 공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의 일기를 보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더 전쟁의 아픔과 상황을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아픔도 『안네의 일기』를 통해 더 가깝게 사람들에게 알려졌듯이 말이다.

일기에는 전쟁 중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 전쟁 중에도 공부를 계속하고 일상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일기 속에 수록되어 있다.

군대에 입대하여 금연을 결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이야기, 공산군을 토벌하는 유격대로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 학교가 폐교되어서 마지막으로 졸업식을 거행하고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의 이야기 등. 전쟁 중에도 사람들의 삶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일기를 통해서 잠시나마 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을 함께 느껴보고, 그 아픔을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3) DDT와 이잡기


유엔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DDT로 이를 잡는 사진들이 종종 보인다. 이는 일반인에게 전염성이 강하여 이를 퇴치하는 것도 전쟁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제2국민병들의 주된 업무가 이를 잡는 일이었음을 고증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전시장에는 DDT와 이잡기 놀이영상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재미와 이해도를 높이었다.    


4) 위문엽서 쓰기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1960, 70년대부터 국군들에게 쓴 위문편지를 전시한다. 이들 위문편지는 전후 세대들이 한번씩은 경험한 것으로 친숙한 편이다. 또한 육군, 해군, 공군 등 3군의 우편엽서함을 만들어 관람객들로 하여금 위문편지를 쓰는 체험 공간을 만들었다. 국방을 지키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다.


5) 전쟁놀이 체험

민속박물관은  <승리의 길>, <국군승진도> 놀이판을 소장하고 있다. 이들 놀이를 통해 군대의 계급을 이해하는 자료로 조선시대 관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승경도와 그 기능이 유사하다.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이들 놀이판에서 윷놀이, 주사위 놀이 등을 체험할 수 있게 장소를 마련하였다.

(1) <승리의 길> 놀이판은 주사위 던지기 놀이이다.

육군본부가 주최가 되어 만들었고 고안자가 대령 문중섭, 놀이판 그림 배종락으로 놀이판 뒷면에 놀이방법과 함께 적혀있다.(8127부대 본부중대 본부소대 소속)


놀이판 문구 등을 통해

1. 소리 안나게 조심히 무찌르자

2. 적은 노린다. 제2의 6.25를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국군승진도>는 윷놀이를 기본으로 한다.

대한군인 유족회 경기도 지부가 만든 것으로 되어있으며, 군 오락시간에 군기를 준수하고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훈련소에 이등병으로 들어와서 가장 윗 부분 놀이의 끝이

“면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국방부장관과  총참모총장과 동등한 위치에 면역이라고 적혀 있는 사실이 군 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부대 안에서 군인들만 이 놀이를 행했는지 이것이 밖으로 전해져서 민간인들도 함께 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놀이판에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6) 고음반 듣기

6.25전쟁 기간이었지만 부산, 대구 등을 중심으로 유성기를 만들어졌다. 이들 유성기는 개인이 소장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다방에서 들려졌다. 민속박물관에서는 6.25전쟁과 관련된 음반 10가지를 선정하여 당시의 음악으로 디지털라이징 작업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들려준다. 당시로 돌아간 느낌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7) 신분증 찍기

6.25전쟁 때 신분증은 개인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따라서 신분증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속박물관은 전시 때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하며, 이를 관람객들에 체험하기 위해 신분증 스티커 코너를 마련하였다. 자신의 사진을 과거의 신분증에 넣어 추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