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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문화!

외암마을

 

 


온양 고을의 안산(案山)인 설화산은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속하는 산악으로 광덕산에서 갈라진 지맥이다.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 한다. 이 설화산 반대편 자락에는 조선초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고불(古佛)맹사성(孟思誠)선생이 살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고려말) 살림집으로 맹씨행당(孟氏杏壇)이 남아있다.

설화산의 서쪽에는 충청도 양반 마을을 대표할 만한 마을이 있으니, 곧 외암민속마을이다. 본래 이웃역말[시흥역]이 있어서 말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오양골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구에 수구막이 기능도 겸하는 마을숲은 큰비가 내리면 강당골과 설라리에서 흘러내려 온 두 개울물이 합하여 넘실댄다 하니, 이곳 반계(磐係)는 풍수에서 말하는 마을의 수구(水口)가 된다.

반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강당골 유원지가 나오는데 외암선생이 [외암기]에서 말하는 후학들을 가르키는 터로 삼았던 석문용추(石門龍湫)이다. 지금도 관선재(觀善齎)의 바깥채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고종때 서원을 없애려는 소용돌이를 피해 불교사찰로 모습을 바꾼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가르칠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외암서사(巍巖書社)'편액은 외암마을 건재고택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용추로 가는 길목에는 외암마을이 예안이씨 집성촌이 된 유래가 있다. 이사종(李嗣宗)이 평택 진씨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사위가 되어 이 곳에 들어온 것이 연이 돼 이사종은 봉수산에 서친의 묘를 정하고, 마을 밖에 정자를 세워 '열승정(閱勝停)'이라 하였다 한다. 정자는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열승쟁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전해지며, 그 기문(記文)또한 건재고택에 온전히 남아 있다.

마을 정면의 야트막한 산은 면잠산(眠蠶山)이다. 주민들은 흔히 '먼적산'이라고도 하는데 주변 산악 가운에 가장 먼저 떠내려와서 머물렀다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을의 조산은 멀리 유곡리에 우뚝 솟은 봉수산은 한 달음에 갈 수는 없지만 자동차로 지나는 길이라면 잠시 멈추고, 외암의 예안 이씨들이 대대로 묻힌 명당을 음미해 볼 수는 있을것이다.

원래 외암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 마을 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인 구릉의 골말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의 주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묘소의 남쪽에 집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진참봉의 집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이 예안이씨다. 시작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외암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예안 이씨 집안의 족보를 보면 문과 급제자로 이성렬이정렬이 있다. 이성렬은 고종2년(1865)에 태어나 고종25년(18888)에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이정렬은 고종 5년(1868)에 태어나 고종 28년(189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참판에 까지 이르렀고, 고종황제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조선시대 생원ㆍ진사 합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을 통해 확인된 외암출신 생원ㆍ진사는 11명에 달한다. 이외에 이사병과 이건주가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이건주는 1796년(정조20)에 충청도 관찰사 이정운이 국왕의 분부에 응해 천거한 3사람중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건주가 죽은지 3년이 지나 1822년(순조22)에는 선비들의 상언으로 예조에서 고 광흥수 이건주의 효행에 정려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기도 하였다.

퇴호 이정렬(1868~1950)은 조선말기에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는데,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매우 아끼어 필묵과 첨지를 내려주기도 하였다.그는 17세 되던해 명성황후에게 당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34세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

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인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송악으로 낙향한 그해 11월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일대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

이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를 건너면서 약한 구릉지에 집들이 길을 따라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은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나무가지와 같이 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 열매가 맺어 있는 것과 같은 자연형태와 같은 마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마을이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원칙이 있다. 즉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을 주산이라 하는데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긴 선이 이어지는 축선에 일정한 영역을 만들어 그 영역 안에 집들을 배치해 두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집이 앉은 방향은 거의 서남향이다.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신창댁은 병사댁이라 불리워지던 택호가 바뀐것이다. 신창댁이라는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씨의 부인인 보성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인한다.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외암 이간의 묘소는 외암마을의 서쪽 100여m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자리잡고있다. 외암 이간은 1727년 윤 3월 14일에 별세하였고 그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렀다가, 1961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비의 전체높이는3.75m이다. 비문은 지돈령부사 홍직필이 짓고, 전판돈령부사 윤용구가 썼으며, 외암 이간의 6세손이며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글을 새겼다.원래 신도비는 묘비의 일종으로 높은 벼슬이나 학문이 출중한 인물에 한하여 무덤 근처나 큰 길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세워 두는 것이다. 외암선생 신도비의 경우에도 마을의 서쪽에 있는 외암 이간 묘소의 50여m전방 속칭 삼상당의 평평한 대지에 세워졌던 것이 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암동천 석각은 높이 52cm, 너비 175c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새겼다. 끝에는 세로로 이용찬서(李用瓚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을 새긴 이용찬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이며, 건재 이욱렬의 셋째 아들로 이승만정권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정려 건물 안에는 명정 현판과 정려기가 있는데, 명정 현판에는 '열녀안동권씨지문(烈女安東權氏之門)'이라 새겨져 있다. 열녀 안동권씨는 진사를 지낸 권연(權淵)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다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예안이씨 가문의 이용덕에게 시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용덕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후손이며, 퇴호거사 참판 이정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집간다음해에 남편이

15세가 되면서 요절하였다. 청상과부가 된 안동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변변치 못한 제물이지만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고, 나아가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다. 평생 과부로 지내다가 나이 86세가 되어 조카인 이홍선을 아들로 삼았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 이홍선의 동생인 이득선의 아들을 손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켰다. 안동권씨 부인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문교부와 문공부에 특별히 천거하여 표창장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려기는 안동권씨의 조카인 이득선씨의 부탁으로 1978년에 전원식씨가 글을 짓고 최병무씨가 글씨를 썼다.

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 조선숙종 33년 (1707)에 세운 외암 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栽)'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의 [온양군읍지]에서는 천서 윤혼과 외암 이간이 이곳에서 서로 강학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외암선생이 별세한 다음 한참을 지나 1820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지자 향유들이 그를 관선재에 배향하면서 외암서사(巍巖書社)라고도 일컬어졌다.

그 후 대원군 때 서원이 철거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외암서사를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고, 공주의 마곡사에서 불상을 모셔다가 안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선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33호 외암 선생문집 판각 307매가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강법사(講法寺)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얼마전 보수할 때 '숭정후세삼을유삼월이십일일묘시중수상량(崇楨後歲三乙酉三月二十一日卯時重修上樑)'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으로 1765년 (영조 41)에 크게 보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용추(龍湫)는 송악면 강당리의 안쪽 멱시 아래 냇가에 있는 못이다 옛날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바위에 '산고무이동침화양(山庫武夷洞沈華陽)' 여덟자를 새기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동침화양의 글자를 거꾸로 따서 양화담(陽華澹)이라 하여 널리 선전하였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인근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인데, 예전에도 외암리의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추의 바위 이곳 저곳에 외암리 출신 선비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외암 이간의 외암기에는 석문용추(石門龍秋)라는 표현들이 보이고 있으며 한시 외암오수에도 용추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