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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근거
- 베트남에서 왕릉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는 반면 그 이전 왕조의 왕릉에 대해서는 충분한 유적의 조사나 정비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응우엔 왕조는 19세기에 시작해서 1945년까지 이어진 비교적 짧은 수명의 왕조였다. 왕릉 역시 7기에 불과하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황실은 늦어도 기원 7세기경에는 확실한 역사적인 뒷받침 아래, 대를 이어 지속해나갔다. 다만 일본 황실의 경우 11세기 이후에는 천황이 거의 정치 실권을 쥐지 못하였고 장례를 소홀히 하는 불교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능의 건설이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1천년 가까운 기간을 보냈다. 그 결과 일본 천황릉에 대해서는 현재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는 800기 이상의 능묘 가운데 그 피장자에 대한 확증이 부족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이에 비하면 조선왕조의 왕릉은 5백년의 왕조 역사를 통해서 일관된 원칙 아래 정성을 다하여 왕릉이 조성되고 제례가 지속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황릉에는 상세하고도 방대한 문헌기록이 남아있어서 왕릉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 능제 비교
- 능제 측면에서 보면 베트남의 왕릉은 중국 황제릉의 축소판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베트남 황제릉은 기본적으로 제일 밖에 홍문을 두고 홍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좌우에 석조의 인물과 동물상을 세우며 그 뒤에는 비석을 모신 정자를 짓고 그 안에는 제례를 위한 전각을 세우고 그 뒤에 누각의 일종인 명루와 봉분을 보호하는 보성을 갖추고 그 위에 봉분을 모신다. 이것은 중국, 명, 청대 능침제도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의 경우에는 전체 능역이 중국에 비해 작고 석조 조각물의 크기도 왜소한 편이며 침전이나 명루, 보성 역시 규모면에서 명, 청대 것보다 작다는 점이다.
- 보존,관리상태의 비교
- 조선 왕조 왕릉은 중국, 베트남, 일본과 다른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일본, 베트남과 비교해서 조선왕조 왕릉은 그 보존, 관리 측면에서도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왕릉은 거의 대부분이 건립 당초의 위치를 그래도 지키고 있으며 왕릉의 영역 역시 대부분 크게 훼손되지 않고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은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제한되고 왕릉 내 수목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엄격한 법령이 시행되었다. 또 가뭄 시 화재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왕릉 외곽의 일정한 둘레는 수목을 심지 않고 민간인의 거주를 제한하는 구역을 설정하여 능역을 보호해 왔다. 그러한 보호는 조선왕조가 끝난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상당 부분 존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천황릉은 그 대부분이 교토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토부의 도시 경역 확장에 따라 능역 상당부분이 축소되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봉분 상당수가 도굴꾼에 의해 도굴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경우는 4, 5기 정도의 천황릉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으나 나머지 능들은 사회주의 정권이 지속되면서 관리를 소홀히 하여 능침시설이 훼손된 상태라고 한다.
- 무엇보다도 조선 왕조 왕릉에서 주목되는 점은 5백 년간 정성껏 이어오던 왕릉의 제례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유교적인 전통이 사라진 듯이 보이지만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는 여전히 유교적 관습이 강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여전히 존중하는 점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것은 왕릉의 제사이며 이것은 21세기를 맞은 현대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이 점은 베트남,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조선 왕릉이 갖는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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