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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새통

칼의 노래


칼의 노래,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 표지, 우측이 100만부 판매 기념으로 새로 제작된 표지이다 ⓒ 생각의 나무  


제1 악장 - 칼날이 예리하게 섰다, 곧 노래가 시작되리라


누구에게나 인생에 한 번쯤은 가슴 벅찬 꿈을 꾸며 무언가를 동경하는 시간이 있다죠? 아주 멋 훗날 인생 선배의 위치에 섰을 때 제가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꿈은 바로 '작가의 길'입니다. 그러한 저에게 문학적인 면에서 늘 동경해 마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김훈'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미당 서정주 이후 문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김훈이 유일한데다, 그의 언어가 '시'가 아닌 '산문'이라는 점에서 어찌보면 최초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자, 지금부터 시작할 저의 이야기는 한 청년을 완전히 매료시킨 문학의 대가에게 바치는 '칼의 노래'라고 보셔도 돼요.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 아니, '노래'는 제가 부를게요. 여러분은 읽기를, 아니 듣기를 시작하세요. 노래가락이 얼마나 구성지고 아름다운지 저와 함께 음미하면서.

                                                                             
        김훈 작가의 강연회 및 사인회 현장, 그의 인기는 현재 활동 중인 작가 중에서도 폭발적이다 ⓒ 생각의 나무 


제2 악장 - 칼의 지엄함을 알지라, '펜보다 칼이 강하다'

작가 김훈이 본래 기자였다는 사실 다들 아시죠? 이게 참 묘해요. 제가 지금 기자에요. 대.학.생.기.자. 기자 앞에 '대학생'이라는 수식어가 왠지 저의 전문성이나 필력을 수줍게 만드는 부분도 있지만, 저는 대학생 기자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김훈도 기자였데요. 대학생 기자가 아닌 그냥 기자. 그런데 이 사람 우리나라에서 꽤나 유명한 언론사를 여러차례 옮겨 다녔습니다. 부서도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들락나락 거리면서, 일간지에 있다가 주간지로 갈아타고 또 얼마 안되서 일간지도 다시 집 옮기고. 아무리 지금처럼 취업난이 심하지 않던 시대라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기자를 언론사에서 매번 받아주었다는게 신기하기까지 한데요. 기자로서의 김훈의 이력은 보통의 기자들과 약간 다릅니다. 기자이지만 여행 칼럼을 아주 오래동안 연재한 적이 있는데다, 개인 사설을 많이 썼습니다.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정보를 전하는 전통적인 기자상과는 좀 다르다는 거죠. 그런데 무엇이 바로 그로 하여금 약간 '튀는' 기자의 길을 걷게 한 것일까요? 그의 글솜씨가 제대로 특출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신문지상에 써내려간 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고, 심지어는 동료 기자들조차도 그의 글솜씨에 대하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다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김훈 작가가 한국일보 재직시절에 함께 일한 동료기자중 한 명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자도 아닌, 그렇다고 작가도 아닌 무언가 정의내릴 수 없는 예술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확실한 건 김훈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김훈은 기자라는 직업에 큰 사명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습니다. 특히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 중에는 직설적으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자기는 극도로 증오하며 기자는 겨우 2류 직업이라는 소견을 밝혔는데요. 또한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자의 존엄함은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뿐 그 의상의 확대해석은 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언듯 보기에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가 무색하리만큼 속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탐구정신이야말로 훗날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독자들은 이러한 사조에 바탕을 둔 그의 문학에 열광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글쓰는 직업'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자각이 무조건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 듯 보입니다.

                                                                            
     김훈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며 시종일관 글쓰는 직업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 생각의 나무  


제 3 악장 - 칼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장군의 외로운 운명은 칼을 움켜쥔다

오랜시간 다른 이들의 눈에 '사회 부적응자'이자 '작가같은 기자'로 비춰진 삶을 살아온 그가 어느날 회사에 사표를 내던지고 훌쩍 떠나버립니다.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말이죠. 그리고서 그는 백만부가 넘게 팔린 대표작 '칼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자, 여기까지 정리가 좀 되시나요? 김훈이라는 작가. '작가'라는 이름 뒤에는 이렇듯 꽤 오랜 시행착오와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뒤섞여 있습니다. 여전히 컴퓨터를 전혀 할 줄 몰라 출판사에 원고를 줄 때 손으로 빼곡하게 적은 원고지를 보낸다는 작가 김훈. 그가 기자의 삶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세상에 가장 내뱉고 싶었던 메세지는 바로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백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외롭게 고군분투하던 한 무인(이순신)의 손에 쥐어진 '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소설 속 이순신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12척 남은 전함으로 적을 격파하고, 적의 서진을 결단코 막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야 이 책에서라고 변할 리 없지만 그는 용맹하기 보다는 차분하고, 긍정적이기보다는 근심이 많아 보입니다. 외부의 난관을 용맹스럽게 극복할 전장의 영웅은 이 곳에 없고, 외부에서 조여오는 제약들에 대한 무력감이 시종일관 이야기의 전체적인 정서를 지배합니다. 이 작품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다루면서도 전쟁 전체를 우리에게 비춰주지 않는 대신, 철저히 이순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힘이 없었고, 오직 ‘전체’가 자신에게 할당한 영역에서만 운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조정에 불복한다는 의심을 사 죽음의 문턱 앞에 갔던 이순신은 전황의 어려움으로 인해 다시 전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가 운신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하게 인식케 해주었죠. 전쟁에서 지면 적에게 죽을 것이고, 전쟁에서 이기면 임금에게 죽을 운명입니다. 오랜 전쟁의 영웅은 전후의 조정에게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면사첩을 자신이 머무는 토방에 걸어놓고 자주 들여다 보았습니다.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명확해 보였습니다. 그는 적을 벨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을 가두어 놓은 이 상황을 벨 수는 없었다. 충과 무를 숭상하는 자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되 조정에 불충한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선택은 오직 한 가지였다. 승리하되 전장에서 자신을 마감하는 것. 때문에 적이 퇴각하던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죽음은 ‘각본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이순신의 죽음은 위장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이순신은 살아남았으나 역적이 되어 생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다는 설입니다.

                                                                             

           김훈은 소설의 아이템을 찾기 위해 자주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다. 남한한성을 방문한 김훈 ⓒ 생각의 나무  


제 4 악장 - 칼이 징.징.징 운다, 세상에 꼼짝없이 갇힌 칼이 절규한다

 저는 '칼의 노래'를 시스템에 대해 무력한 개별성의 비애로 해석하였습니다. 서열화된 신분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였던 ‘충성’은 그 구성원들의 가슴에 깊이 스몄을 것입니다. 이순신의 가슴 속에도 마찬가지였을테죠. 그는 충성의 가치와 무인의 긍지를 가슴에 품고 바다로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전략과 판단을 통해 전쟁을 수행했겠죠. 하지만 그는 불충하였다는 이유로 압송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왕실은 승리를 원했으나, 임금보다 지지를 받는 영웅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충성과 승리는 반드시 필요했지만, 반드시 현실의 시스템을 뒤흔들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 점은 바로 오늘날 '체면'과 '겉치레'의 유지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전체주의와도 연결이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꿈이나 소중한 가치들을 가정 '형편', 범 국가적 '현실'이라는 명분 아래 놓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시스템은 '자기 안정'을 전제로 모든 가치를 허용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금 조선시대보다 더욱 많은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은 탐욕스럽고, 야만스럽긴하나 어쨌든 '자본주의'가 '봉건왕조'보다는 좀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좀 더 유연한 시스템(체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개인에게 ‘운신의 폭’은 제한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습니다.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듯합니다. 저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에 대한 욕망의 배출구로 낮선 어딘가로의 '여행'을 택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속 이순신은 자주 마음 속의 칼이 징징징 우는 것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배만 불리는 관리도, 정치적 체면만 차리고 전장을 뜨려는 명나라 장수도 베어버리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스템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칼은 밤낮으로 울어대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사실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게 울어댄 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울음의 기록이며 우리들의 무력함에 대한 비애인 동시에 또한 무력한 와중에서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했던 이순신의, 아니 우리 모두의 영웅담인 셈이죠. 이와 같은 영웅의 의연함이 저를 감동시켜 오늘날 제가 한 자루 칼을 쥐고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칼을 잡기는커녕 피도 보지 않고 살리라 다짐했던 청년이 어느덧 칼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에게 있어 실로 오랫만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설렘을 안겨준 책. 진정한 영웅이 겪는 가슴앓이를 덤덤한 필체와 간결한 감성으로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하나도 흐트러짐없이 기록해낸 이 시대의 걸작. 소설이 아니라 대서사시라고 해야할 바로 그책. 바로 '칼의 노래'입니다.
                                                                                

       필자가 책상 위에 두고 거의 매일같이 읽었던 김훈의 소설과 에세이집, 지금도 자주 읽곤 한다 ⓒ허영지  


제 5 악장 - 칼이 눕는다, 칼이 단 잠을 청한 사이 어느덧 내가 그 칼을 움켜잡는다

 여러분은 방금 전까지 김훈에게 바치는 칼의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어때요. 가락이 좀 구성진가요? 형편 없었다구요?
뭐, 그럼 할 수 없죠. 후훗. 저는 소설 '칼의 노래'와 관련한 역사적, 문학적 의문에 대하여 어떠한 해답도 서둘러 내놓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와 문학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축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려 들거나 장황하게 설명하려 드는 것은 그 주인공들에게 실례일 뿐더러, 솔직히 말하자면 저 자신도 해답을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온 종일 흐리고 어두운 날 바다 위에 홀로 서서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겪었을 한 인간의 고뇌를 떠올리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떠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죠. 사실 독자인 우리가 굳이 스스로 소설 속의 이순신이 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제가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였듯,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왜 이순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