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칼의 노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제1 악장 - 칼날이 예리하게 섰다, 곧 노래가 시작되리라
그런데 정작 김훈은 기자라는 직업에 큰 사명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습니다. 특히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 중에는 직설적으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자기는 극도로 증오하며 기자는 겨우 2류 직업이라는 소견을 밝혔는데요. 또한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자의 존엄함은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뿐 그 의상의 확대해석은 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언듯 보기에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가 무색하리만큼 속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탐구정신이야말로 훗날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독자들은 이러한 사조에 바탕을 둔 그의 문학에 열광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글쓰는 직업'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자각이 무조건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 듯 보입니다.
소설 속 이순신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12척 남은 전함으로 적을 격파하고, 적의 서진을 결단코 막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야 이 책에서라고 변할 리 없지만 그는 용맹하기 보다는 차분하고, 긍정적이기보다는 근심이 많아 보입니다. 외부의 난관을 용맹스럽게 극복할 전장의 영웅은 이 곳에 없고, 외부에서 조여오는 제약들에 대한 무력감이 시종일관 이야기의 전체적인 정서를 지배합니다. 이 작품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다루면서도 전쟁 전체를 우리에게 비춰주지 않는 대신, 철저히 이순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힘이 없었고, 오직 ‘전체’가 자신에게 할당한 영역에서만 운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조정에 불복한다는 의심을 사 죽음의 문턱 앞에 갔던 이순신은 전황의 어려움으로 인해 다시 전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가 운신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하게 인식케 해주었죠. 전쟁에서 지면 적에게 죽을 것이고, 전쟁에서 이기면 임금에게 죽을 운명입니다. 오랜 전쟁의 영웅은 전후의 조정에게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꿈이나 소중한 가치들을 가정 '형편', 범 국가적 '현실'이라는 명분 아래 놓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시스템은 '자기 안정'을 전제로 모든 가치를 허용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금 조선시대보다 더욱 많은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은 탐욕스럽고, 야만스럽긴하나 어쨌든 '자본주의'가 '봉건왕조'보다는 좀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좀 더 유연한 시스템(체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개인에게 ‘운신의 폭’은 제한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습니다.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듯합니다. 저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에 대한 욕망의 배출구로 낮선 어딘가로의 '여행'을 택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속 이순신은 자주 마음 속의 칼이 징징징 우는 것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배만 불리는 관리도, 정치적 체면만 차리고 전장을 뜨려는 명나라 장수도 베어버리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스템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칼은 밤낮으로 울어대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사실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게 울어댄 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울음의 기록이며 우리들의 무력함에 대한 비애인 동시에 또한 무력한 와중에서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했던 이순신의, 아니 우리 모두의 영웅담인 셈이죠. 이와
그는 면사첩을 자신이 머무는 토방에 걸어놓고 자주 들여다 보았습니다.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명확해 보였습니다. 그는 적을 벨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을 가두어 놓은 이 상황을 벨 수는 없었다. 충과 무를 숭상하는 자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되 조정에 불충한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선택은 오직 한 가지였다. 승리하되 전장에서 자신을 마감하는 것. 때문에 적이 퇴각하던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죽음은 ‘각본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이순신의 죽음은 위장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이순신은 살아남았으나 역적이 되어 생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다는 설입니다.
제 4 악장 - 칼이 징.징.징 운다, 세상에 꼼짝없이 갇힌 칼이 절규한다
저는 '칼의 노래'를 시스템에 대해 무력한 개별성의 비애로 해석하였습니다. 서열화된 신분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였던 ‘충성’은 그 구성원들의 가슴에 깊이 스몄을 것입니다. 이순신의 가슴 속에도 마찬가지였을테죠. 그는 충성의 가치와 무인의 긍지를 가슴에 품고 바다로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전략과 판단을 통해 전쟁을 수행했겠죠. 하지만 그는 불충하였다는 이유로 압송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왕실은 승리를 원했으나, 임금보다 지지를 받는 영웅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충성과 승리는 반드시 필요했지만, 반드시 현실의 시스템을 뒤흔들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 점은 바로 오늘날 '체면'과 '겉치레'의 유지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전체주의와도 연결이 되는 대목입니다.
제 5 악장 - 칼이 눕는다, 칼이 단 잠을 청한 사이 어느덧 내가 그 칼을 움켜잡는다
여러분은 방금 전까지 김훈에게 바치는 칼의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어때요. 가락이 좀 구성진가요? 형편 없었다구요?
뭐, 그럼 할 수 없죠. 후훗. 저는 소설 '칼의 노래'와 관련한 역사적, 문학적 의문에 대하여 어떠한 해답도 서둘러 내놓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와 문학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축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려 들거나 장황하게 설명하려 드는 것은 그 주인공들에게 실례일 뿐더러, 솔직히 말하자면 저 자신도 해답을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온 종일 흐리고 어두운 날 바다 위에 홀로 서서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겪었을 한 인간의 고뇌를 떠올리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떠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죠. 사실 독자인 우리가 굳이 스스로 소설 속의 이순신이 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제가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였듯,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왜 이순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이죠.
'BOOK새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지원 도서 (0) | 2010.04.28 |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도서관' (0) | 2010.04.27 |
경남신문 추천, 읽을만한 책 (0) | 2010.04.25 |
김형오 국회의장, 희망편지2 출간 (0) | 2010.04.25 |
최고의 인기작가와 출판사 (0) | 2010.04.23 |